사람들 게시판의 최근글http://jeolla.com/bbs/?tbl=people사람들 게시판에 올라온 최근글을 RSS 리더기로 볼 수 있습니다.GN Board RSS Generator가수 조아라, 'talk & 라이브 콘서트‘ 열어http://jeolla.com/bbs/?tbl=people&mode=VIEW&num=23&category=<p>3월 8일 오후 7시, 가수 조아라 씨가 ‘해남문화원 2층 공연장’에서 ‘talk &amp; 라이브 콘서트‘란 주제로 미니 콘서트를 열었다.</p><p>조 씨가 해남지역에서 처음 시도한 토크형 콘서트는 주인공이 관객과 대화를 이어가며 중간 중간 연주와 노래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클래식 공연이나 인터넷 방송에서 오래전부터 시도되고 있는 공연 포맷 중의 하나이다.</p><p>조 씨는 콘서트에서 자신의 앨범에 수록된 ‘사랑했던 이유’, ‘날 용서하지 마’, ‘그저 마냥 좋은 사람’ 등을 열창했다.</p><p>조 씨는 또, 찬조 출연한 ‘한마음 패밀리’와 ‘나팔꽃 사랑’과 함께 박인희의 ‘봄이 오는 길’, 김만수의 ‘푸른 시절’, 어니언스의 ‘사랑의 진실’ 등 7080세대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불러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p><p>조아라 씨는 현재 이름이 꽤 알려진 중견가수로,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 모 인터넷 방송사에서 방송진행자로 활약하고 있다.</p><p>이번 공연을 기획한 해남생활음악협회 한재철 회장은 “오늘 같은 콘서틀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지원할 용의가 있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의 저변확대를 위해 앞으로도 꾸준하게 공연활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nbsp;</p>...관리자2018-03-09 00:36:28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 임양수 관장,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수상http://jeolla.com/bbs/?tbl=people&mode=VIEW&num=21&category=<p>지난 5월 18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열린 &#39;제19회 전국박물관인대회&#39;에서 &lsquo;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rsquo; 임양수 관장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수상했다.</p><br /> <br /> <p>임 관장은 박물관 관람객 유치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비롯한 관광분야 발전과 박물관 문화향상에 적극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장관 표창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p><br /> <br /> <p>임 관장은 수상소감에서 &ldquo;앞으로도 더 열심히 활동하는 &lsquo;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rsquo;이 되겠다&lsquo;는 다짐을 피력했다.</p><br /> <br /> <p>임 관장은 박물관에 대한 전반적인 업무와 해양자연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현재 해남군 송지면 땅끝마을 인근에서 &lsquo;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rsquo;을 운영하고 있다.</p><br /> ...윤승현2016-06-03 11:00:12장성 문일태 가구 장인, ‘2016국제기로미술대전’ 대상 수상http://jeolla.com/bbs/?tbl=people&mode=VIEW&num=20&category=<p>지난 5월 31일, (사)대한민국 기로미술협회가 주관한 &lsquo;2016국제기로미술대전&rsquo; 시상식에서 가구 장인 문일태 씨가 공예부문 &lsquo;대상&rsquo; 수상자로 &lsquo;상장&rsquo;과 상금을 품에 안았다. 문 씨가 출품한 &lsquo;편백콘솔&rsquo;이 심사위원들에게 작품성을 인정받아 대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lsquo;편백콘솔&rsquo;에는 제작자 문 씨의 참신한 아이디어와 숙련된 솜씨가 녹아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심사평이다.</p><br /> <br /> <p>&lsquo;편백콘솔&rsquo;은 유럽 로열스위트룸에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콘솔과 우리나라의 화장대를 결합해 만든 작품이다. &lsquo;편백콘솔&rsquo;은 콘솔 기능 30%, 보석함 기능 40%, 화장대 기능 30%를 융합하여 만든 작품으로 무엇보다 실용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그래서, 서서 화장하는 것에 익숙한 여성이나 연예인에게 추천할만한 작품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장착된 거울이 열리기 때문에 보석함으로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출품된 작품은 작은 미니어처 형태지만 얼마든지 크게 만들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p><br /> <br /> <p>사실, &lsquo;2016국제기로미술대전&rsquo;은 문 씨가 생애 최초로 공모에 참가한 대회이자, 또 처음으로 &lsquo;대상&rsquo; 수상의 영예를 안긴 대회이다. 그만큼 문 씨에게 커다란 충격과 기쁨으로 다가왔을 법하다.</p><br /> <br /> <p>&ldquo;정성을 쏟아 만든 작품이긴 하지만 이렇게 대상을 수상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입상이나 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기대도 안 했는데......,&rdquo;</p><br /> <br /> <p>문 씨는 &lsquo;대상&rsquo; 수상이 아직 실감나지 않는 듯 기대와는 달리 그저 담담하게 답변했다.</p><br /> <br /> <p>가구 장인 문 씨의 경력은 결코 범상치 않다. 국내 굴지의 가구업체에서의 수십 년 경력, 가구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의 경력, 그리고 러시아에서 경력을 모두 합하면 40여 년에 이른다. 이 정도면 가구 장인의 반열에 올린다고 이의를 제기할 사람을 별로 없을 것이다.</p><br /> <br /> <p>문 씨의 편백 사랑은 유별나다. 그래서인지 편백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박식하다. 편백의 장단점, 편백의 효용성, 국제적인 편백의 동향까지. 편백의 꽃말까지 찾는 사람은 아마 문 씨 뿐일 것 같다. 그래서 &lsquo;편백콘솔&rsquo;을 왜 구상했느냐는 질문에 &ldquo;편백을 알리고 싶어서&rdquo;라고 당당하게 답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p><br /> <br /> <p>문 씨는 현재 고향 장성에서 &lsquo;장성편백가구&rsquo;란 공방에서 기술이사를 맡고 있다. 어쩌면 그가 가진 기술에 딱 맞는 직업인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는 앞으로 가구와 편백을 떠나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는 입버릇처럼 말한다.<br /><br /> &ldquo;장성 편백을 널리 알리고 장성편백을 이용해 국민의 건강을 지키겠다&rdquo;고 .</p><br /> ...윤승현2016-06-02 20:32:15해남 '한듬 봉사회'를 찾아서http://jeolla.com/bbs/?tbl=people&mode=VIEW&num=18&category=<p>쓸고 닦고, 또 꺼내서 치우기를 반복......, 그래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시골 세간이 많으면 얼마나 많으랴 만은 막상 손대고 보면 호락호락한 세간살이는 별로 없다. 몇날 며칠을 할 수 있다면 쉬엄쉬엄 쉬어가면서 할 수도 있겠지만 짧은 가을 해가 넘어가기 전에 마쳐야 하는 일이라 보통 바쁜 것이 아니다.</p><br /> <p>가을햇살이 따사로운 23일, 대한적십사 &lsquo;한듬 봉사회&rsquo;와 &lsquo;우슬 봉사회&rsquo;가 마산면 금자리에 모였다. 몇 달 전부터 봉사 대상으로 물색해둔 임 할머니 댁 집수리를 위해서다. </p><br /> <p>임 할머니 집은 60~70년대에 지어진 집으로, 아담하고 작은 마루에 크고 작은 방 세 칸이 달린 농촌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특징이라면 옛날 흙집처럼 지붕이 낮고, 슬레이트 대신 지붕에 함석을 올린 집이라는 점이다. 얕은 처마에는 올 봄 이주해간 제비집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오른 쪽 작은 방은 구들장은 푹 꺼져 있어 사람이 기거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임 할머니는 왼쪽 방을 주방으로 쓰고 있었고 비교적 넓게 보이는 가운데 방에서 기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오늘 계획은 봉사회 회원들이 임 할머니가 모든 방을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리모델링에 가까운 수리는 하는 것이다. </p><br /> <p>일을 시작하기 전 &lsquo;한듬 봉사회&rsquo;와 &lsquo;우슬 봉사회&rsquo;가 각자 역할 분담을 했다. 한듬 봉사회는 집안 청소, 가재도구 청소, 주방 청소를 맡았다. 한듬 봉상회 회원 중 일부는 주방 기구를 수돗가로 들고 나와 깨끗이 씻었다. 일부는 마당으로 들어내지 못한 씽크대를 들춰가며 내용물을 정리하거나 청소하는 일을 맡았다. 또 다른 회원들은 방에 남겨진 가재도구를 물걸레로 정성껏 닦았다.</p><br /> <p>그 시간 &lsquo;우슬 봉사회&rsquo; 회원들은 &lsquo;한듬 봉사회&rsquo; 회원들과 같은 영역에서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일부는 벽과 천정 도배를 하고 있었고, 일부는 전기 배선을 손보고 있었다. 또 다른 회원들은 꺼진 구들장을 손보기 위해 마당에서 모래와 시멘트를 배합하고 있었다.</p><br /> <p>이 광경을 지켜보던 &lsquo;한듬 봉사회&rsquo; 회원 문 모 씨는 &lsquo;우슬 봉사회&rsquo;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은 '한듬 봉사회'에 가입 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전제한 뒤, 많은 봉사단체와 함께 봉사활동에 참여해 보았지만, 이렇게 &lsquo;우슬 봉사회&rsquo;처럼 자신의 몸과 기술로 일하는 봉사단체는 흔치 않다고 강조했다.</p><br /> <p>금자리 마을 부녀회장도 공사 현장을 찾아왔다. 공사가 어떻게 진행 되는가도 보고, 이곳을 찾아 봉사활동을 해주는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란다.</p><br /> <p>어느 순간 현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 추가로 장판을 깔아야 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 같다. 예산이 추가되는 일이라 &lsquo;한듬 봉사회&rsquo; 회장인 황미향 씨의 질문이&nbsp; 몇 마디 이어졌다. 그러나 특별한 절차 없이 좋은 방향으로 결정된 것 같다.</p><br /> <p>황미향 회장은 집수리에 필요한 비용을 일 년 새우젓 장사를 해서 남긴 이익금으로 충당한다고 했다. 그리고 부족한 금액은 봉사회 회비에서 지출한단다. 빠듯한 살림에 1년에 2회 정도 봉사활동에 참가하다 보니 예산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단다.</p><br /> <p>봉사 현장을 보고 지나가던 마을 주민이 말했다.<br />&ldquo;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요.&rdquo;<br />&ldquo;예?&rdquo;<br />&ldquo;이렇게 집수리도 해주고, 마을에 점심도 주고 하니 말이오.&rdquo;<br />&ldquo;세금이 많이 들 텐데......,&rdquo;</p><br /> <p>동네 주민은 세금으로 집을 수리하고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p><br /> <p>일에 열중하다 보니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런데도 점심시간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 남았다. 구들장에 미장하는 일이다. 시멘트는 굳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 일을 마쳐야만 순조롭게 오늘 내에 집수리를 마칠 수 있다. 그래서 우슬 봉사회 회원들 일부는 마당에서 양동이에 시멘트를 담아 방으로 나르고 미장 전문가인 김 씨는 방에서 꺼진 구들장을 수리했다.</p><br /> <p>점심은 금자리 마을회관에 차려졌다. 한눈에 봐도 정갈하고 맛있게 보이는 점심이었다. 이 점심은 한듬 봉사회 회원인 백경식당 사장님이 후원한 것이란다. </p><br /> <p>점심 식사를 마친 봉사회 회원들은 각자로 자리로 돌아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까지 집수리에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lsquo;한듬 봉사회&rsquo;와 &lsquo;우슬 봉사회&rsquo;의 오늘 일정이 마무리되고 있었다.</p>...윤승현2014-11-24 06:22:28화순 개천사에서 만난 무위태극권http://jeolla.com/bbs/?tbl=people&mode=VIEW&num=14&category=<p>&lsquo;태극권과 노자&rsquo;를 집필한 무명자 민웅기 씨는 책머리에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p><br /> <p>&ldquo;나에게 태극권은 한판의 춤과 같다. 태극과 음양의 궤적에 따라, 때로는 강하고 때로는 부드러우며, 때로는 열고 때로는 합하며, 때로는 실하고 때로는 허하며, 때로는 아래로 향하고 위로 솟구쳐 올라온다.&rdquo;</p><br /> <p>위의 내용에서 태극권에 대한 민웅기 씨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p><br /> <p>태극권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무술이다. 주윤발, 장쯔이 주연의 &lsquo;와호장룡&rsquo;, 조문탁, 번소황 주연의 &lsquo;태극권: 무림 7대 고수전&rsquo;, 이연걸의 &lsquo;태극권&rsquo; 등에 등장하는 무술이 바로 태극권이다. 그런데 민 씨는 우리가 영상으로 접하던 태극권에 대한 통념을 깨고 있다. 그는 태극권을 노자의 사상과 사유법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p><br /> <p>2011년, 화순 개천사에서 민웅기 씨를 처음 만났다. 당시,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는 생소하고 난해한 관념의 틀로 엮여 있는 민 씨의 주장과 사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승자와 패자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무술로서의 태극권이 어떻게 &lsquo;양생불사&rsquo;의 수련술로 표현되는가에 관심이 가 있었다.</p><br /> <p>필자가 화순 개천사를 찾은 것은 2011년 7월경이었다. </p><br /> <p>개천사는 조계종 말사 규모로는 제법 넓은 면적을 가졌다. 입구에서 바라보면, 정면 2층 높이에 아담한 대웅전을 갖추고 있고, 공터 왼쪽 끄트머리에 천불전, 그리고 오른쪽 끄트머리에 요사채를 갖춘 절이었다. 넓은 공터에는 키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고, 요사채 가까운 곳에 더위에 지친 견공 한 분은 혀를 길게 빼물고 자신의 집을 지켰다.</p><br /> <p>필자가 그 당시 왜 개천사에 가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사찰 구경 겸 해서 무작정 들어갔는데 주지스님을 뵈었고, 주지스님과 대화 중에 태극권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만 기억한다.</p><br /> <p>민 씨 부부를 기다리는 동안의 무료함을 떨치기 위해 필자는 절의 한 보살님과 함께 앞산에 올랐다. 필자가 오뉴월 땡칠이 마냥 헉헉대는 데도 보살님은 굳건히 그리고 씩씩하게 산을 오른다. 누굴 탓하랴. 나의 저질 체력. 그 때는 그랬다. 덥수룩한 수염에 축 쳐져 있는 필자의 몰골을 보니 늑대도 물어가지 않겠다. </p><br /> <p>절에 도착하니 민 씨 부부가 개천사에 도착해 있었다. 주지스님의 소개로 민웅기 씨와 인사를 나눈 뒤 태극권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이 내게는 안드로메다 얘기였다. 선명하고 명료하게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조각조각 분열된 사고체계의 아노미였다.</p><br /> <p>필자의 이해를 돕고, 멋진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민 씨 부부와 개천사 주지스님이 태극권을 시연해 주었다. 민 씨는 여러 가지 자세를 선보이며 설명도 해주었다. 그런데 어쩌랴. 필자가 기억하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 필자를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민 씨 부부와 주지스님께는 정말 죄송한 일이다. 그래서 민 씨가 지은 책에 나온 자세 몇 가지를 소개한다. </p><br /> <p>팔꿈치 아래에 권이 들어간 모양을 본떠 만든 &lsquo;주저간추&#32920;底看&#25462;&rsquo;, 구름의 손이라는 &lsquo;운수&rsquo;, 커다란 말에 올라타기 위해 먼저 손으로 말안장을 더듬어 본다는 &lsquo;고탐마&rsquo; 등이 있다. 이 식들은 민 씨가 자신의 저서에 소개한 40식에 포함된 식으로 &lsquo;무위태극권&rsquo; 108식 중의 일부이다.</p><br /> <p>개천사에 어둠이 내리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태극권을 수련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부처님이 모셔진 한 건물에 모두 모였다. 그리고 민 씨의 지도로 태극권 수련에 들어갔다. 그런데 태극권 수련에는 다른 무술처럼&nbsp; 요란한 기합소리가 없었다. 태극권에 침묵의 수련이라는 별칭도 붙여야 할 것 같다.</p><br /> <p>민웅기 씨는 1960년 해남에서 태어나 전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화순으로 귀농해 무등산 기슭에 살고 있으며, 현재 무위태극권 장문인으로 조선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노자 도덕경』을 강의하고 있다.</p>...윤승현2014-10-20 23:46:49한영자 한국국악협회 해남지부장, “실력 있는 후학 양성에 힘 쏟을 것”http://jeolla.com/bbs/?tbl=people&mode=VIEW&num=13&category=<p>한영자 한국국악협회 신임 해남지부장이 국악협회에 대한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p><br /> <br /> <p>한국국악협회 해남지부는 지금까지 행정가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으나 한 지부장이 새로 취임하면서 실기 능력을 갖춘 인사가 국악협회를 이끌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 지부장은 그에 걸맞은 협회로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p><br /> <br /> <p>한 지부장은 먼저, 회원 간의 반목과 불미스러운 일로 땅에 추락한 국악협회의 명성을 되찾는 일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해남국악협회는 그동안 끝임 없는 잡음으로 군민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한 지부장이 이런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p><br /> <br /> <p>한 지부장은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되살리는 일에 온 힘을 쏟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그는 우리 주변에서 하나 둘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가 너무 아깝고 이런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계승하거나 복원하는 일에 힘을 쏟겠다는 것이다.</p><br /> <br /> <p>한 지부장은 국악협회가 전문국악인이든 동호인이든 가리지 않고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밝혔다.&nbsp;많은 분들이 국악협회에 참여해 재미있고 즐거운 국악협회가 되었으면 한다는 소망도 내비췄다.</p><br /> <br /> <p>그는 또 국악협회가 나서서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실력 있는 인재를 키워 해남의 국악 실력을 전국에 알리고 해남국악의 맥을 잇게 하겠다는 것이다. 한 지부장은 협회차원에서 이 같은 교육을 하겠다고 말했다</p><br /> <br /> <p>한 지부장은 &#39;해남국악대전&#39;을 전국에서 명성 높은 대회로 키우겠는 포부도 밝혔다. 그는 현재 해남국악대전 최고의 상이 국무총리 상이어서 앞으로 대통령상으로 격상이 꼭 필요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국악협회 회원뿐만 아니라 행정과 군민 그리고 언론의 지원이 필요하다고&nbsp;강조했다. 한 지부장은 이런 노력은 전임 김동석 지부장 재임 시부터 노력해 오고 있는 일이라며 자신이 꼭 이루어 내겠다고 말했다.<br /><br /> <br /><br /> 한 지부장은 광주여자 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 사회복지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p><br /> <br /> <p>그는 대통상 수상자끼리 겨루는 대회에서 천하명무상을 수상했으며 태평무 이수자, 설장고춤 이수자, 경남교방굿거리 이수자, 고법 추정남 선생 이수자이기도 하다.</p><br /> ...윤승현2014-03-27 01:49:34'밸리댄스’에 푹 빠진 진도 세 모녀http://jeolla.com/bbs/?tbl=people&mode=VIEW&num=12&category=<p>어둠이 짙게 찾아드는 시간이면 정지숙 원장이 운영하는 밸리댄스 학원에 원생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일을 마치거나 집에 있다가 오후 강의 시간에 맞춰 밸리댄스를 추러온 원생들이다. 그런데 원생들의 연령대를 가늠하기 어렵다. 초등학생에서부터 할머니뻘 되는 수강생들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밸리댄스는 나이를 가리지 않는 운동인 것 같다.</p><br /> <br /> <p>댄스복을 갈아입은 수강생들이 정면에 설치된 거울을 기준으로 길게 늘어선다. 자신의 모습과 자세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 다음 소형 녹음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밸리댄스를 추기 시작한다.&nbsp; 원생들의 댄스가 진행되는 동안 카랑카랑한 정 원장의 목소리가 이따금 음악을 뚫고 원생들을 압도한다.</p><br /> <br /> <p>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예정된 수업 시간을 채운 수강생들이 하나 둘 떠나고 나자 원생 몇몇만 남았다. 이렇게 남은 이들이 정 원장에게 밸리댄스 지도자 과정을 밟고 있는 수강생들이다.</p><br /> <br /> <p>그들은 모두 6명으로 박효진(초3), 한지연(중1) 양, 그리고 이관순(55세), 박정미, 박효정 씨 세 모녀이다.</p><br /> <br /> <p>박효진, 한지연 양은 정 원장이 초등학교 방과 수업에서 만난 학생들이다. 그런데 본인들이 밸리댄스를 너무 좋아해 밸리댄스 강사를 희망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정 원장으로부터 밸리댄스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다.</p><br /> <br /> <p>이관순 씨는 밸리댄스 경력 3년 차이다. 그리고 지도자 과정의 수강생 중 나이가 가장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밸리댄스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가 밸리댄스를 사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p><br /> <br /> <p>그녀는 주변 사람의 권유로 밸리댄스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에게 밸리댄스를 권유했던 사람은 지금 밸리댄스를 그만 둔 상태고 자신은 밸리댄스가 너무 좋아 지도자 과정을 밟고 있다고 말했다.</p><br /> <br /> <p>그녀가 밸리댄스를 그만 둘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녀는 밸리댄스를 한 뒤로 건강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리고 중년의 여성답지 않게 몸매가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모델처럼 자세가 교정되어 어느 장소에 나가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p><br /> <br /> <p>이런 이유로 그녀는 자신의 딸들에게 밸리댄스를 권유했고 현재 큰 딸, 둘째 딸과 함께 밸리댄스 지도자 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p><br /> <!--StartFragment--><br /> <br /> <p>그녀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딸들과 함께 밸리댄스 추겠다는 말로 그녀의 밸리댄스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p><br /> ...윤승현2014-03-13 10:50:12"염전 일은 내 천직, 내 포부는 해남 소금의 전 세계 유통"http://jeolla.com/bbs/?tbl=people&mode=VIEW&num=9&category=<div><br /> <p align="center" style="margin: 5px 0px;"><img class="chimg_photo" id="image_015585775383786626" style="width: 550px; height: 368px;" alt="" src="/data/image/7bmny6TP.jpg" border="0" /></p></div><br /> <p style="margin: 0px;"><br />보름 넘게 우리를 괴롭혀 오던 열대야가 잠시 주춤한 날이었다. 그러나 계속 된 폭염은 그 기세를 꺾을 줄 몰랐다. 오히려 그 여세를 몰아 우리를 인내의 한계로 내몰고 있었다. 오후 4시, 만호염전은 햇볕을 먹고 사는 염전답게 한 여름 뙤약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염전 자재와 소금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를 빼면 허허벌판이었다. 다행히 염전 입구에는 인부들이 잠시 쉴 수 있게&nbsp;행사용 텐트가 세워져 있었다. 텐트는 굴곡이 심한 땅에 세워서 그런지 누가 위에서 누르고 있는 듯 평균보다 낮고 넓적하게 펼쳐져 있었다. 가뜩이나 바람 한 점 없는 날, 낮은 텐트는 더위를 피하는데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 밑에 앉아있어 봐야 직사광선만 간신히 피할 수 있을 뿐 한낮의 열기와 더위까지는 어쩌지 못했다.</p><br /><br /> <p style="margin: 0px;">모두가 햇볕을 피해 그늘을 찾는 오후 4시 경, 김성경 씨는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써레를 밀고 소금 결정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가 움직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하얀 소금 알갱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 작은 소금 산을 이루었다. 이렇게 모인 소금은 순백의 백색 그대로였다. 염전에서 일하는 그가 폭염을 피할 수 있는 도구는 오직 모자 하나뿐이었다. 누가 열심히 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닌데 김 씨는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지금 손을 놓아버리면 소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울라치면 결정이 좋은 소금은 포기해야 한다. 김 씨가 부지런히 움직인 만큼 좋은 소금이 생산되는 것이다.</p><br /> <div><br /> <p align="center" style="margin: 5px 0px;"><img class="chimg_photo" id="image_0340349431109526" style="width: 550px; height: 368px;" alt="" src="/data/image/kirMBxyPatcSM8JCddZqGf7B6LlW.jpg" border="0" /></p></div><br /><br /><br /> <p style="margin: 0px;">김 씨가 염전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마을에 사는 후배 고 씨가 오토바이에 아들을 태우고 염전을 찾아왔다. 그리고 승용차 한 대가 그의 뒤를 따랐다. 수원에서 사는 관광객 부부가 해남을 여행 온 차에 성경 씨의 소금을 사기위해 일부러 들린 것이었다. 지난해까지는 김 씨가 길가에 포장 점포를 차려 두고 소금을 판매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김 씨가 길거리 점포를 운영하지 않자, 관광객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김 씨 염전에 찾아 온 것이다.</p><br /> <p style="margin: 0px;">&ldquo;작년에도 여기서 소금을 사 갔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도 소금을 사려고 왔습니다.&rdquo;관광객은 지난 해 구입한 소금이 정말 맘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김 씨는 야적장에 있는 소금을 차에 실어주고는 자신의 차에 있는 명함을 꺼내 관광객에게 건넸다.<br />&ldquo;여기 전화번호 있으니 전화로 주문하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rdquo;관광객은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염전을 떠났다.</p><br /><br /> <p style="margin: 0px;"><strong>나는 타고난(?) 염전 일꾼&ldquo;</strong></p><br /> <p style="margin: 0px;">남들은 염전 일 한나절만 해도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더워서 그럴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 정도는 아니고, 힘들긴 해도 할 만합니다.&rdquo;기자가 물었다.&ldquo;체질적으로 타고 나서 그런 것 아닌가요?&rdquo;&ldquo;타고 난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저도 힘들지요. 그런데 남들이 체감하는 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적부터 염전 일을 해서 길이 들었나 봅니다.&rdquo;<br />그의 부친은 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지금의 염전을 인수했다. 그는 그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친의 염전 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시로 나가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23세 되던 해, 건강이 좋지 않은 부친의 부름을 받고 귀향해 현재까지 염전업과 농사일을 하고 있다.</p><br /><br /> <p style="margin: 0px;"><strong>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때 제일 속상해</strong></p><br /> <p style="margin: 0px;">그는 부친과 함께 3정반(7,000여 평)의 염전을 꾸려 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고만고만한 염전 10개가 모여 만호염전이란 법인도 설립했다. 김 씨는 이렇게 모여 있는 10개 염전 주인 모두가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ldquo;제가 아는 이분들은 모두 정직하게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언론에서 소금과 관련된 나쁜 보도가 나올 때, 그리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전화해서 걱정해 줄 때 정말 속상합니다. 극히 일부 염전이나 포대갈이 하는 업자로 인해 전체가 오해를 받는 것이니까요......, 우체국에서 상품을 판매하시는 분이 그러는데 다른 상품은 쉽게 판매가 가능한데 소금 한 포대를 팔기위해 10분 동안을 상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습니다. 소금이 우리 생활에 필수품인 만큼 불신도 그만큼 크다는 얘기 같습니다.&rdquo;<br />그는 자신이 정직하게 소금을 생산한 만큼 소비자들도 자신을 좀 더 믿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큰 것 같았다. 그는 염전에서 함초를 수확해 일 년에 200만 원 정도의 과외수입도 얻고 있다고 말했다.&nbsp;</p><br /><br /> <p style="margin: 0px;"><strong></strong>&nbsp;</p><br /> <div><strong><img width="200" height="299" align="left" alt="" src="/data/image/LaLGiqiUw73gnPg4xBlqrDaBLGiTH.jpg" border="0" /></strong></div><strong><br /> <p style="margin: 0px;">염전 이야기</p></strong><br /> <p><br /><br /></p><br /> <p style="margin: 0px;">김 씨는 이어 염전 얘기를 들려주었다. 염전 일은 보통 2월 중순부터 시작한다. 소금을 생산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먼저 염전을 보수한다. 패이거나 깎인 둑을 정비하고 염전 주변을 말끔하게 청소한다. 그런 다음 3월 초부터 소금 생산을 시작해 그해 10월 말께 소금 생산을 종료한다. 해남의 바닷물 염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낮은 0도인데, 염도를 21~22도까지 끌어올려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다른 지역은 기본 염도가 11도나 되는 곳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소금이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4월 말부터 9월 초까지는 양질의 소금이 생산된다. 그러나 3월 초와 10월 말에 생산되는 소금은 너무 짜 일반인들을&nbsp; 대상으로 판매를 하지 않고 염전을 찾아오는 상인들에게 공업용으로 판매하고 있다. 소금은 염전의 토질에 따라 맛이 다른데 토질이 좋은 곳은 맛 좋은 소금이 생산되고 토질이 나쁜 곳은 애초부터 좋은 소금 생산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가격만 가지고 소금 구매를 판단하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p><br /><br /> <p style="margin: 0px;"><strong>농사 이야기</strong></p><br /> <p style="margin: 0px;">김 씨는 염전 일과 병행해 2만여 평의 논에 벼농사를 짓고 있다. 누가 봐도 대농이다. 그런데 김 씨는 자신은 대농이 아니라고 말했다. 김 씨가 사는 황산면 신정마을에는 김 씨보다 농사를 더 많이 짓는 사람이 있어 자신은 상대적으로 대농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가 염전 일을 하면서도 이렇게 농사를 많이 지을 수 있는 이유는 새벽 4시부터 밤늦게까지 논에 나가 일하시는 부지런한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운 좋게 염전 일과 농사가 겹치지 않기 때문이란다. 모내기 할 때는 염전 일과 잠시 겹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염전 일이 한가할 때 벼농사를 지을 수 있어, 염전 일과 논농사를 병행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단다. 그는 염전 일과 가을걷이가 끝나면 절임배추 판매를 준비한다. 틈틈이 그 해 판매할 수 있는 양만큼의 배추를 밭에 미리 심어놓고, 김장철이 돌아오면 자신이 생산한 배추와 소금을 이용해 절임배추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그리고 절임배추 판매가 끝나면 그는 공식적인(?) 휴가에 들어간다. </p><br /><br /> <p style="margin: 0px;"><strong>해남소금 유통은 나의 포부</strong></p><br /> <p style="margin: 0px;">그는 염업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 중 자신이 제일 어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좀 더 진취적인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해남소금의 전 세계 유통이다. 입소문으로는 해남소금의 우수성이 입증되고 있는데 비해 그 경제적 위상과 가치는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그래서 그는 해남소금의 직거래 유통망을 갖추고 싶다고 했다. 현재 업자들에게 헐값에 판매되고 있는 해남소금의 직거래를 유도해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가 이런 신념을 갖게 된 데는 그가 소금 생산자로 소금의 특징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 씨는 &ldquo;소금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다른 상품과는 달리 가격이 더 안정적이고, 변질되거나 상할 우려가 없으며,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더 값이 나가는 장점을 지닌 상품이기 때문에 유통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rdquo;이라고 말했다.</p><br /><br /> <p><strong>사랑하는 가족과 지역에 대한 봉사</strong><br />그는 지인의 소개로 아내를 만났다. 그리고 첫눈에 반해 결혼을 했다. 현재는 아내와의 사이에 초등학생 아들과 딸을 두고 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특별하게 좋은 순간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항상 아내와 아이들이 좋기 때문이란다. 가족을 설명하는 그의 표정에는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가족만 생각해도 그저 행복한 사람 그런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정말 순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축복받은 삶을 세상 사람과 나누려 한다고 했다. 그는 현재 지역의 봉사단체 몇 곳에 가입해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와 함께 &lsquo;뿌리나눔&rsquo;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황영선 씨는 &ldquo;회비만 내고 봉사활동에 참석하지 않는 회원도 있는데 김성경 후배는 한 번도 봉사활동에 빠진 것을 본적이 없다&rdquo;며 &ldquo;그의 성실함과 진정성에 감탄했다&rdquo;고 말했다. </p>...윤승현2012-08-26 08:48:12윤춘영 가죽 공예가, 명인의 길로 성큼...http://jeolla.com/bbs/?tbl=people&mode=VIEW&num=8&category=<p>&ldquo;가죽공예는 어찌 보면 정말 정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성을 들인 만큼 좋은 작품을 선보일 수 있으니까요. 잠시라도 교만하거나 나태하면 바로 작업 중인 작품에 티가 납니다.&rdquo;</p><br /> <br /> <p>가죽공예 20년 외길 윤춘영 공예가의 말이다.</p><br /> <br /> <p><strong>대상을 타기까지</strong><br /><br /> 윤춘영 씨는 얼마 전 &lsquo;제10회 대한민국 아카데미 미술대전 공예부분&rsquo;에서 &lsquo;모란 화초장&rsquo;이란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전통적인 화초장을 재해석해 한지와 가죽공예를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작품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p><br /> <br /> <p>윤 씨는&nbsp; 가죽공예와 관련해 이곳저곳 많은 행사장을 다녔다. 때로는 관람객으로 때로는 제품을 판매하는 공예가로. 윤 씨는 이 때 한지의 세계를 접했다. 그리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무궁무진한 한지의 활용성을 간파했다. 윤 씨가 한지와 가죽공예를 작품을 구상하게 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그러나 생각을 실행해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바쁜 스케줄 때문에 한가하게 작품을 구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p><br /> <br /> <p>그렇게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작품 한번 만들어봐야지 하면서도 그 생각은 잠시 뿐이었다.</p><br /> <br /> <p>윤 씨가 가죽공예 강의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lsquo;대한민국 공예대전&rsquo; 공모가 시작됐다. 덩달아 윤 씨의 고민도 시작됐다.</p><br /> <br /> <p>그때였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 같고, 흥부가에 나와 조금은 친숙한 물건. 그것은 바로 화초장이었다. 더 나아가 한지와 가죽공예가 결합된 화초장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p><br /> <br /> <p>윤 씨는 일단 목표가 정해지자 강의가 없는 시간을 쪼개 틈틈이 작업을 해 나갔다. 먼저 가죽에 모란꽃을 그린 다음 꽃잎의 경계를 따라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 나갔다. 그동안 바느질 장인으로부터 사사 받은 바느질 솜씨가 유용하게 쓰이는 순간이었다. 잎을 따라 바느질을 해주자 모란꽃에 입체감이 생겼다. 그리고 꽃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p><br /> <br /> <p>구입한 반제품 화초장에 가죽공예 작품을 붙이자 완성 된 화초장의 형태를 갖췄다. 화초장을 완성한 윤 씨는 화초장에 금속제품으로 된 다리를 붙였다. 출품하기 전 금속제품 다리에 한지를 덮어씌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윤 씨는 화초장에 금속다리를 붙인 채로 출품해야 했다. 그것도 마감시간을 넘겨 간신히 접수했다. 접수가 완료된 시간이 오후 10시 30분이었다.</p><br /> <br /> <p>힘들게 접수했지만 결과는 도예선 탈락이었다. 윤 씨가 처음 맛 본 쓴 잔이었다. 윤 씨는 시간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을 위로해 보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p><br /> <br /> <p>며칠 후 작품을 되돌려 받았다. 윤 씨는 꼼꼼히 작품을 확인했다. 그 결과 작품이 부실덩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쁘다는 핑계로 최소한의 확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p><br /> <br /> <p>윤 씨는 이때 자신이 자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nbsp;&nbsp;&nbsp;</p><br /> <br /> <p>윤 씨는 이때부터 꼼꼼하게 작품 수정에 돌입했다. 지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금속재 다리도 없앴다. 미흡한 부분은 좀 더 보완했다. 그런 다음 수정한 화초장을&nbsp;&lsquo;대한민국 아카데미 미술대전&rsquo;에 출품했다. 결과는 대상이었다. 마침내 대상을 획득한 것이다.</p><br /> <br /> <p>&#39;대한민국 공예대전&#39; 입상에 이어&nbsp; &lsquo;대한민국 아카데미 미술대전&rsquo; 대상까지 수상한 윤 씨가&nbsp;가죽공예 명인의 반열에 들어선 순간이었다.</p><br /> <br /> <p><strong>강의를 위해 전국을 다니다</strong></p><br /> <br /> <p>윤 씨의 또 다른 직업은 강사다. 각종 기관과 학교 등을 다니며 가죽공예를 가르치고 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인근지역은 물론이고 화순, 고흥까지 출근해 강의를 하고 있다. 그녀의 강의를 듣는 수강생의 연령층도 다양하다. 초등학교 학생에서부터 70세를 노인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p><br /> <br /> <p>그녀는 자신이 15년 동안 가르친 사람들을 일렬로 세우면 강진에서 서울까지 이어질 것이고 강의한 기관을 세우면 강진에서 광주까지는 갈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p><br /> <br /> <p>한번은 서울 모 기관에서 윤 씨에게 강의를 부탁했다. 대구공예박람회에서 윤 씨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실력을 인정해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윤 씨의 판단에 그 과정은 준전문가 과정이었다. 윤 씨는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그 강의를 위해 몇 달간 서울로 출근했다. 윤 씨는 지금도 그 제자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p><br /> <br /> <p><strong>윤 씨, 꿈을 말하다</strong><br /><br /> 윤 씨는 뚜벅이다. 운전면허가 없다. 가까운 곳은 지인에게 부탁해 이동하지만 먼 곳에 가려면 양손에 가죽공예 실습 도구를 잔뜩 들고 버스를 타야 한다. 그래서 올해는 꼭 면허를 따고 싶다고 말했다.</p><br /> <br /> <p>윤 씨가 가장 이루고 싶은 것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작업을 할 수 있는 넒은 공간을 갖는 것이다. 지금은 집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공간이 좁아 멀리서 찾아온 제자들을 맞이하기에는 좀 민망하단다. 그래서 넓은 작업공간을 갖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p><br /> <br /> <p>윤 씨는 가죽공예 관련 책을 저술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중에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실용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이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든 작품을 설명해 주고 설명을 따라하면 동일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그런 책을 쓰고 싶단다.</p><br /> <br /> <p>윤 씨는 공예 인생 30년을 넘긴 장인들이 즐비한 이 세계에서 아직은 명인보다는 중견 공예가로 불리는 것이 맞다. 그러나 허울 좋은 껍데기를 벗기고 작품의 세계로 얘기한다면 그녀는 분명 가죽공예의 명인이다.</p><br /> ...관리자2012-08-08 10:30:05'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 최경환http://jeolla.com/bbs/?tbl=people&mode=VIEW&num=7&category=<p style="margin: 0px">김 대통령은 마음속에 있는 천사와 악마 중에 천사의 말을 듣고 순종하고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든지 마음속에 천사가 있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고 있지만, &lsquo;위험하니까 못하겠다. 손해보니까 못하겠다&rsquo; 이런 생각을 갖기 때문에 양심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lsquo;행동하는 양심&rsquo;은 내 마음속에 있는 악마의 말을 멀리하고 천사의 말을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최경환, 『김대중 리더쉽』)</p><br /> <br /><br /> <p style="margin: 0px">속 깊은 형에 대한 존경과 감사</p><br /> <br /><br /> <p style="margin: 0px">최경환은 자신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쌍둥이 형을 말한다. 쌍둥이 형은 최경환보다 5분 먼저 세상의 빛을 봤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형이 지금까지 집안의 가장 노릇을 도맡아서 하고 있다.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최경환의 뒷바라지 까지. 최경환이 학생운동을 할 때도, 민주화운동으로 음습하고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을 때도 형은 언제나 최경환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멘토였다. 이런 형에 대한 최경환의 감사와 존경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p><br /> <br /><br /> <p style="margin: 0px">인생의 전환점 &lsquo;5.18광주민주화운동&rsquo;</p><br /> <br /><br /> <p style="margin: 0px">5&lsquo;.18광주민주화운동&rsquo;이 없었다면 최경환은 지금 쯤 어느 신문사나 방송사에서 근무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대학시절 그의 꿈은 신문기자였기 때문이다. <br />기자를 꿈꿨던 청년. 그의 순탄했던 삶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성균관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1981년, 그는 고향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시민 학살 사건을 알게 된다. 이런 사실을 접한 그는 격하게 분노했다.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이때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1년 후였다.<br />그 후 그는 투사로 변했다. 1981년 &lsquo;광주학살 책임자 처단과 진상규명&rsquo; 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붙들려 감옥에 가야 했다. 세간에서는 이 사건을 &lsquo;학림사건&rsquo;이라고 부른다. &lsquo;학림사건&rsquo;은 이 전 장관 등이 &lsquo;전민학련&rsquo;과 &lsquo;전민노련&rsquo;을 결성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최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건으로, 경찰은 숲처럼 무성한 학생운동 조직을 일망타진했다는 뜻으로 이 사건에 '학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p><br /> <br /><br /> <p style="margin: 0px">이 사건이 있은 후, 1986년 최경환은 &lsquo;광주학살원흉처단국민대회&rsquo;를 주동한 혐의로 또다시 감옥에 가야했다. 최경환은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p><br /> <br /><br /> <p style="margin: 0px">&ldquo;1886년 민청련 활동 당시 종로2가 YMCA 앞에서 &lsquo;광주학살원흉처단대회&rsquo; 시위를 주도하게 되었다. 나는 민청련에서 시위주동자로 자청해 나가게 되었다. 물론 감옥살이를 각오해야 했다. 이날 시위는 학생, 노동자, 청년단체들의 연합시위로 내 역할은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지하철 입구 뚜껑에 올라가 성명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대를 선동하는 일이었다. 나는 사전에 답사도 했다. 시간이 됐다. 지하철 뚜껑으로 달려가 한 팔과 한 다리를 올렸다. 그러나 몸이 올라가지 못했다. 나는 힘이 부족했다. 연습도 하지 않았다. 지하철 뚜껑에 매달려 있는 시간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를 경찰들이 달려와 낚아채 거리에 내동이 쳤다. 나는 그 일로 준비하지 않고, 힘을 키우지 않고 몸을 던지는 것은 무모한 일이고 일을 망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나는 또 10개월의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rdquo;&nbsp; </p><br /> <p style="margin: 0px">이렇게&nbsp;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동안 그의 삶은 출세 코스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학교생활도 엉망이 되었다. 제적과 복학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남들은 4년 만에 졸업하는 대학을 14만에 졸업했다.</p><br /> <br /><br /> <p style="margin: 0px">청와대 생활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p><br /> <br /><br /> <p style="margin: 0px">당시 재야출신 노동운동가 방용석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국회에 발을 놓게 된 최경환은 1999년 청와대 공보수석실에 발탁되어 청와대 행정관, 공보기획보좌관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하게 된다.</p><br /> <p style="margin: 0px">&ldquo;청와대 생활은 한마디로 새벽별보고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긴장된 시간의 연속이었다. 청와대에 근무한 3년 여 동안 사적인 인간관계는 되도록 갖지 않았다. 이미 그때부터 청와대는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봉사하는 자리가 되어 있었다.&nbsp; <br />&nbsp;우리는 청와대에서 &lsquo;비가와도 걱정, 비가 안 와도 걱정&rsquo;했다.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때그때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가 어떻게 하면 국민들의 마음과 가까이 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자신의 비전과 정책을 추진하는 자리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고 상처를 위로하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br />&nbsp;나는 청와대 홈페이지를 담당하는 비서관이었다. 매일매일 대통령 메일이나 청와대 홈페이지, 주요 포털에 실린 네티즌들의 글을 모아 김 대통령에게 올려드렸다. 김 대통령은 인터넷 글을 읽기를 좋아했다. 더 많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내용은 국정에 많이 참고가 됐다. 인터넷에 실린 글들을 보시고 담당 비서관이나 장관에게 그 내용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지시하는 일이 많았다.&ldquo; </p><br /> <br /><br /> <p style="margin: 0px">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p><br /> <br /><br /> <p style="margin: 0px">최경환은 자신을 &lsquo;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rsquo;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1999년 청와대 공보수석실에 발탁된 후부터, 2008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10년 동안 김대중 대통령의 곁을 지켰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굳이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그가 김대중 대통령 곁을 끝까지 지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br />그는 또 자신을 &lsquo;순장파&rsquo;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청와대를 거친 이들이 정계로 나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거나, 대학으로 가 교수가 되기도 하고,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에 취직을 하는 상황에서 자신은 김 대통령을 끝까지 모셨기 때문이란다.</p><br /> <br /><br /> <p style="margin: 0px">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쉽</p><br /> <br /><br /> <p style="margin: 0px">이런 그가 김대중 대통령의 8가지 리더쉽을 분석한 &lsquo;김대중 리더쉽&rsquo;이란 책을 펴냈다.<br />다음은 책 내용 중의 한 구절이다.</p><br /> <p style="margin: 0px">&ldquo;민주주의는 싸우는 자, 지키는 자의 것이다. 싸우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고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려선 안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언젠가는 온다. &lsquo;행동하는 양심&rsquo;으로 하면 빨리 오고, 외면하면 늦게 온다.&rdquo;</p><br /> <p style="margin: 0px">&lsquo;DJ전도사&rsquo; 최경환. 어쩌면 그는 김 대통령의 말을 빌려 현 시국을 호되게 질타하고 있는지 모른다. </p><br /> <br /><br /> <p style="margin: 0px">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온 동지들</p><br /> <br /><br /> <p style="margin: 0px">&ldquo;나는 80년대 전두환과 싸우면서 맺은 친구 선후배들을 좋아한다. 일부는 공부를 다시 시작해 의사, 변호사가 되어 있는 사람도 있고, 사업을 하거나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후배도 있다. 또한 통일운동, 평화운동, 시민자치운동, 생태환경운동 등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힘들게 산다.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역사를 바로잡았다는 자부심들은 크지만 생활은 여유롭지 못하다. <br />최근 나는 이명박 정부 들어와 민주주의 가치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을 보면서 80년대 선후배들에게 말하곤 한다. &lsquo;우리가 조로증에 걸린 것 아니냐. 다시 참여하고 나서야 되지 않겠느냐&rsquo;고. 소시민적 삶을 사는 자신들을 자책하는 목소리도 많지만, 이들 70년대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가장 건강한 세력이라고 생각한다.&nbsp;&nbsp; <br />나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개척했던 원풍모방, 동일방직 노동조합 출신들과 함께 &lsquo;녹색환경운동&rsquo;이라는 환경단체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70년대 후반 구로공단의 &lsquo;공순이&rsquo;들이었다. 당시 군사독재권력과 자본과 맞서 싸운 맹렬 여성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엄마가 돼 있다. 10여전 그들은 환경단체를 결성했다. 아이들과 함께 생태학습을 하고, 환경캠페인을 벌인다. 자신들이 젊은 시절 몸을 내던졌던 생각과 가치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 행복하다.&ldquo;</p><br /> <p style="margin: 0px">최경환은 당시의 소회를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p><br /> <br /><br /> <p style="margin: 0px">민주주의의 새로운 아이콘</p><br /> <br /><br /> <p style="margin: 0px">최경환은 소통을 즐긴다고 했다. 트위터도 하고 페이스북도 하며 사람들과의 소통영역을 넓혀가고 있다고 했다. 디지털네트워크를 통한 소통은 이제 특별한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세상과 소통하려는 그의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 불통과 일방통행의 시대에 소통은 그만큼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이다.<br /></p>...관리자2012-07-27 10:5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