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익상의 문집 ‘자오집’을 통해 본 창암의 생애



  • 그동안 지역 간 논란이 되어 오던 창암 이삼만의 생애와 관련, 30대 후반의 행적을 기록한 내용이 한익상의 문집 ‘자오집’(自娛集)에 실려 있는 것으로 밝혀져 이삼만의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전주문화원 소속 동국진체연구소의 이용엽 소장이 최근 발간된 전주문화원의 소식지 ‘호남제일성’에 200년 전 창암의 행적을 조명해보는 ‘자오집의 강옹설’이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밝혀졌다. 


    자오집은 자오 한익상(1767~1846)의 시문집 필사본으로 시와 문이 착종돼 실린 것으로 전체 6권으로 되어 있다. 현재 규장각도서에 소장돼 있지만, 편집을 거치지 않은 초고본 형태로 아직 번역작업을 거치지 않아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문집이다. 


    이 자오집에는 한익상이 문과에 급제한 후 전주 조경묘 별검(종8품)으로 재직(1809~1810)하며 전주에서 지은 글 중 ‘강옹설’(强翁說)이라는 부분에 이삼만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강옹(强翁)은 사람의 호(號)를 가리키는 것으로, 지금까지 창암(蒼巖)으로만 알려져 왔던 이삼만의 새로운 호로 기록하고 있다. 눌진 조광진,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후기 3대 서예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이삼만이 창암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전 강옹이라는 호를 사용했다는 첫 기록인 셈이다.

     

    자오집은 한익상이 전주에서 근무할 때 기록한 자료를 토대로 했기 때문에 이삼만이 30대 후반이 되는 200년전 당시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신빙성 있고 가장 오래된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30살이던 1800년에도 이삼만이 전주에서 화동서법을 목판본으로 발간한 사실이 있어, 최소 30대에는 전주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음을 유추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정읍이 이삼만의 고향이 정읍이고, 학예에 정진했던 곳 역시 정읍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대치되는 결과물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우리나라 대표적 학술기관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펴 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삼만의 고향을 정읍으로, 이보다 이른 시기인 일제강점기 시절 발간된 ‘전주부사’에는 고향을 전주로 각각 기록하고 있어 이삼만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수그러들지 않는 숙제다. 


    다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삼만이 1845년 사망한 것으로 적혀있지만, 전주시가 최근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남고진사적비’는 1847년 이삼만이 직접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이삼만이 죽은 다음에 혼령이 되어 쓴 글이 아니라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용의 일부는 수정돼야만 할 것으로 보여 전주부사의 내용이 더 신빙성 있음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또한, 자오집에서 이삼만은 문과에 급제한 한익상과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삼만은 글씨만 잘 쓴 것이 아니라 줄판과 소리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학문의 수준도 한익상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


    동국진체연구소의 이용엽 소장은 “문답 내용 중 한익상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막힘이 없이 나름대로 철학이 담겨 있는 답변을 하는 이삼만의 인품은 예술인이면서도 가볍지 않고 지덕을 갖춘 도덕군자의 풍모를 연상케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글씨는 잘 썼으나, 학문적 깊이가 없다’며 최근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삼만 폄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가장 명쾌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여 더욱 주목받는다.

    /김상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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