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문화, 사람을 만나다

  •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 본부장 김동애 선생님 인터뷰

  • 민주광장의 빛

    여기, 8년 동안의 싸움에도 무너지지 않은 전사의 기지가 있다. 대학 강사들의 지위 회복과 대학 교육 정상화를 위해 국회 앞에 텐트를 친 것이 2007년. 그 이후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대통령이 두 번 바뀌었고, 강사 남편은 부당해고를 당했으며, 여의도뿐만이 아니라 고대 민주광장에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오늘도 그녀는 강사들도 대학의 주체임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민주’광장이란 이름이 빛바래지 않도록 광장을 밝혀주는 텐트의 주인, 김동애 선생님을 만났다.

    고대문화(이하 꼬문) : 선생님 안녕하세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김동애 선생님(이하 동애) : 평일에는 국회 앞에 서 텐트 생활을 하고, 주말엔 당진에 있는 집에 내려가서 지내요. 집에선 농사짓고 꽃 기르는 게 일이에요. 그 밖에는 서정민 열사의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가기도 하고, 정책토론회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예쁨받는 모범생인 줄 알았는데

    꼬문: 중국학을 전공하신 건가요
    동애: 학부 전공은 사학과였고, 대학원에서 중국 근현대사를 전공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동양사' 하면 중국사가 대세였어요. 중국사에서 열강에 의한 착취로 얼룩진 근현대사 부분이 당시 우리나라의 역사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중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꼬문: 역사 공부가 선생님 삶에 영향을 많이 끼쳤나 봐요.
    동애: 역사학도니까 민족문제나 반독재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계층 문제나 노동 문제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 때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면서, '이런 문제가 우리 가까이에 있구나.'란 생각에 눈이 확 떠졌죠. 당시에는 전태일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지금까지 온 걸 돌아보면 누구 탓이 아니고, 독재를 접하고 역사의식이 조금 눈뜨면서 길이 조금씩 달라져왔던 것 같아요.

    꼬문: 대학원은 언제 입학하신 건가요
    동애: 대학원은 73년에 입학했어요. 제가 69학번이니까, 학사과정을 마치고 바로 석사과정을 밟은 거죠.

    꼬문: 역사 공부가 잘 맞으셨나 봐요
    동애: 학부생 때엔 촉망받는 학생이었어요. 대학원에 가려는 학생도 적었고, 학부 수업도 열심히 안 듣는 시기인데, 한문도 배우고, 중국어랑 일본어도 배우러 다니고 해서 선생님들이 예뻐해 주셨어요.

    꼬문: 김영곤 선생님을 중국어 수업에서 만나셨다고 들었어요!
    동애: 제가 숙대를 다녔는데, 그 당시엔 중국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어요. 고등학교 동창이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중국어 1년 교육과정이 있다고 해서 신청했죠. 김영곤 선생님은 전 해에 그 과정을 마치고 그 수업 교수님의조교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수업 끝날 때쯤마다 오시더라고요. 집도 같은 방향이라서 같이 집에 가다보니 친해진 거죠.

    꼬문: 석사과정은 얼마나 걸리셨어요
    동애: 석사과정은 2년에 걸쳐 이수했어요.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교수님들이 석사논문을 다시 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당시엔 그게 거절의 방법인지 모르고 논문을 계속 다시 썼어요. 제가 직접적으로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건 아니니깐, 논문을 다시 쓰면 강의를 주실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 당시엔 박사과정이 없어서 석사를 마치고 바로 강의를 할 수 있었거든요. 2년이나 계속 논문이 트집잡히고서야 이게 거절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꼬문: 김영곤 선생님 때문에 그랬던 건가요
    동애: 그 당시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학교에 상주하고 있었어요. 선생님들이 옥바라지하던 저에게 강의를 주실 수 없었겠죠. 학위도 못 받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학위는 겨우 주시더라고요.

    꼬문: 당시 충격이 크셨겠어요.
    동애: 당연히 연구자로 살 줄 알았어요. 그저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될 줄 몰랐죠. 가지고 있던 자료나 쓰고 있던 책도 전부 다른 사람 줬죠. 꽤나 절망적이었죠. 그래도 돌아보면 논문이 통과되지 못한 2년간 써클 지도하면서 학생들하고 소통하고, 나름 보람 있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더 공부하고 싶어

    꼬문: 그 이후에는 뭘 하셨나요
    동애: 여성단체하고 사회교육단체에서 2년씩 일을 했어요. 제가 사실상 저희 가족의 가장이었거든요. 그런데 계속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공부가 하고 싶었죠. 그때 김영곤 선생님이 애를 1명 더 낳아서 공부에 대한 열망을 잊든지, 아니면 아예 박사과정에 도전하라고 권유해줘서, 대만 유학을 결심했죠. 한국에서는 김영곤 선생님 뒷바라지에 애들까지 돌보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는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아이들을 친정과 시댁에 맡기고 대만으로 떠났지요.

    꼬문: 대만 생활은 어떠셨나요
    동애: 처음 대만에 간 것은 1983년이었어요. 1년 동안은 중국어를 제대로 배우고, 84~86년에 박사과정을 밟았어요. 논문이랑 종합시험 때문에 89년에 다시 갔다가 한국에는 91년에 돌아왔어요. 처음엔 멋모르고 갔는데, 두 번째에 다시 가려니 싫더라고요. 남편은 수배 중에다가 공부하려니 꾀도 나고, 대학 강의도 나가고 있어서 안 나가려고 했는데, 중학교 2학년이던 딸이 그러더라고요. 엄마가 가지 않으면 평생 하던 일을 못 마친 사람이 되지 않느냐. 빨리 가서 끝내고 와라. 그 말을 들으니 안 갈 수가 없더라고요. 자식에게 하던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일 순 없잖아요. 그래서 논문 작성과 종합시험 통과하는 것을 1년 정도 예상하고 갔는데, 어디 계획처럼 되나요.
     외국어로 논문을 쓰다 보니 2년이나 걸렸어요. 2년 동안 제 딸은 남편 친구 집과 제 친구 집을 오가면서 지냈고, 아들은 시댁에서 지냈어요. 참 힘겹게 공부했어요. 저 혼자 공부한 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도와줘서 학위를 받을 수 있었죠. 그런데도 학문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요.

    꼬문: 그럼 두 번째로 대만에 가시기 전에도 강의를 하신건가요
    동애: 86~89년에는 숙대, 대전 목원대, 상명대, 강원대 등을 다니면서 시간강사 생활을 했어요. 당시 숙대에서 강사료로 8만 4천원을 받았어요. 근데 시어머님이 ‘박사 며느리’가 집안일까지 하기 힘들지 않느냐면서 시골에 있는 시이모님 모시고 살면서 한 달에 7만원‘만’ 드리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외국까지 가서 박사까지 하고 온 며느리니까 강사료를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셨던 거죠. 지금 강사님들도 아마 그럴 거예요. 석사 박사 마치고 교수라는 호칭을 불러주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음 학기 강의가 있을까 걱정해야 하는 신세죠. 다른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말하기 힘들어서 신문배달을 하려 했는데, 자전거랑 오토바이를 못 타니까 그것조차 어렵더라고요. 그렇게 어려운 현실을 겪었던 게 지금까지 시간강사 문제로 싸울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시간강사 문제의 본질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까지 싸워오지 못했을 것 같아요.

    꼬문: 박사과정을 걷는 데 자제분들이 많은 힘이 되었을 것 같아요.
    동애: 큰 힘이 되었죠. 애들이 없었으면 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저희는 애들한테 한 학기 등록금밖에 보태주지 않았어요. 용돈과 등록금도 알아서 다 해결하고, 지금도 딸은 저희에게 생활비를 보내줘요. 젊어서 공부할 때는 부모님 덕을 보았고, 지금은 자식 덕을 보고 있어요. 저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는 덕분이에요. 제가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시간강사 김동애

    꼬문: 한성대 대우교수3로는 언제부터 근무하신건가요
    동애: 박사 논문 마무리 짓고 돌아와서는 숙대, 한성대, 한신대, 충북대에서 강의하며 전임교수가 되려고 노력했어요. 그 중에 한성대에서 급하게 정규 교원자리가 비면서 전임 대타로 들어갔어요. 강사료는 시간강사의 두 배로 주고요. 그 당시엔 그게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아무한테도 얘기를 안했어요. 그래도 상황이 힘들어 강사료를 두 배로 받는 게 꼭 필요했었고, 박사학위가 있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서 쉽게 전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에 대우전임(전임교원)으로 계약했으니 1년 계약 이후부터는 당연히 대우전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7년 6개월이 지나서 갑자기 강사료가 절반으로 줄더라고요. 학교에 물어봤더니 전임교원이 아니었고, 1년 이후에는 그냥 대우교수(비전임교원)였더라고요.

    꼬문: 처음에 직위해제 및 감봉무효 소송을 하셨죠
    동애: 그 때 1년 동안 전임대우교원을 한다는 계약서를 썼어요. 그래서 그게 당연히 연장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재판이 2년이나 걸렸어요. 지방법원에서 졌을 때 정말 힘들었어요. 대학에 있는 그 누구도 저를 상대해주지 않았거든요. 재판하면서 대우교수라는 제도가 다른 학교에도 있는지 알아보려 해도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어요. 아는 기자 분한테 대학 시간강사 관련해서 보도를 부탁하려고 다른 시간강사 분들을 찾았는데, 전화연결도 어렵더라고요. 전임교수인 친구는 저한테 ‘자기 등에 칼을 꽂으려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소송을 시작할 때부터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사람들이 말렸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죠. 전임교수인 친구들의 회피도 서운했지만, 그 친구의 말은 아직도 상처에요. 당시 정규직 교수들 눈에는 제가 역적이었겠죠. 서정민 열사 유서에도 나오지만, 시간강사는 개나 노예로 취급받고 있어요. 노예라고 인식하는데, 무슨 말을 하든지 화가 났겠죠.

    꼬문: 그 때의 기억이 교원지위 투쟁에 큰 원동력이 되셨겠어요.
    동애: 대학 강의를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 들어서면 왜 나는 작아져야 하는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그게 이해가 안됐어요. 나는 왜 당당하지 못하고 주눅이 들게 되는 걸까? 그걸 이 싸움을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저한테는 적(籍)이 없었더라고요.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교원(敎員)지위 회복은 노예해방이에요. 교원지위를 회복하는 것이 강사료 인상보다 우선이에요. 노예 상태에서 해방부터 되어야 임금투쟁을 할 수 있죠. 인생은 자기가 투쟁하는 만큼 얻고 살아갈 수 있어요. 거저 가져다가 주면 몰라요. 저는 교원지위 회복까지 할 거예요. 그 이후에 어떠한 교원이 될지 싸우는 건 후대 강사들과 학생들의 몫이죠.

    꼬문: 대학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동애: 대학은 사람을 길러내는 곳이잖아요. 강사들에게 노예 같은 대우를 하면서 “연구자가 되어라. 학자가 되어라” 고 말할 수 있겠어요? 학생들이 어떻게 뭘 배울 수 있겠어요. 대학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면 안 되는 거죠. 사람을 길러내는 곳이잖아요. 반드시 달라져야죠. 그런데 제가 싸워보니 괴로워야 바뀌더라고요. 그냥 좋은 말로는 안 바꿔주더라고요. 아프다고 소리도 지르고, 잘못되었다고 난리를 쳐야 겨우 바뀌더라고요. 이옆에 찢어진 현수막을 그대로 두는 건 이게 우리 의 현실이기 때문이에요. 누군가가 이렇게 현수막
    을 찢는 게, 이런 현수막 하나 지키지 못하는 게 지금 우리 대학의 현실이에요.


    그때까지는 해야죠

    꼬문: 김영곤 선생님보다 먼저 시간강사 싸움을 해오셨는데, 김영곤 선생님이 언론에 관심을 더많이 받는 것 같아요.
    동애: 99년에 투쟁을 시작했는데, 처음에 이 싸움은 저만의 싸움이었어요. 김영곤 선생님이 처음으로 도와준 게 제가 단식하다가 쓰려졌을 때였어요. 본인이 강의를 하다 보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느꼈나 봐요. 이래가지고는 대학에서 비판 담론이 살아남을 수 없다. 대학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를 실감한 거죠. 같이 투쟁하기 시작하면서 그와도 동지가 되었지요. 저는 전직강사이다 보니 현직인 김영곤 선생님한테 일을 많이 떠넘겼어요. 건강상 문제도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 언론의 관심이 그쪽으로 집중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대표성은 계
    속 움직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꼬문: 김영곤 선생님은 학부 때부터 노동운동을적극적으로 하셨잖아요. 결혼을 결정하는 데 고민이 있으셨나요
    동애: 결혼하기 전에 5번을 헤어졌어요. 노동문제를 이해는 해도, 삶으로까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독재 시대에서 살지 않았으면, 그리고 김영곤 선생님을 안 만났으면, 강사도 안하고 그냥 제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을 것 같아요. 언젠가 망우리 공동묘지를 데려가더니 사람이 양주를 마시나 소주를 마시나, 죽으면 겨우 이것밖에 차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그러더라고요. 그 말이 참 충격이었어요.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게. 그 때 마음의 결정을 했어요.
    이제 내년이면 제 나이가 일흔인데, 참 힘든 일이 많았어요. 최근에도 서정민 열사 관련해서 광주에서 싸우는데, 다른 강사들이 몰라주니 더 힘들었어요. 여러 조롱과 비난 앞에서, 정말 힘들 때마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자.’ 그 말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제게 큰 힘이 되어요.

    꼬문: 사실 지금 교원지위를 확보해도 선생님에 게 혜택이 오는 건 아니잖아요.
    동애: 2006년 비정규직 보호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을 때, 국회 앞 집회에서 저는 시간강사 관련 서명을 받으러 다녔어요. 근데 국회에서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되니까 노동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더라고요. 회한이 들었어요. 내가 왜 저 대열에 끼지 못했지. 내가 왜 저들과 함께해서 저들의 비정규직을 막지 못했지. 정말 후회됐어요. 사실 강사의 지위는 이제 저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하지만, 강사 교원지위회복을 요구하니까대학은 정규교수 퇴임하는 자리에 각가지 이름의 비정규교수를 뽑더라고요. 국회에서는 정진후, 우원식, 윤관석, 박주선 의원 순으로 연구강의교수제를 발의해 대학의 비정규교수들을 고등교육법상으로 합법화시키려 했어요. 교수 비정규직화 시도였지요. 아까 말했듯 저와 강사직은 이제 관계가 없지
    만, 이런 식으로 강사직과 교수직이 비정규직화되면 그 다음은 기자, 공무원 등 다른 직업도 (전부 다) 비정규직이 되겠죠. 결국 우리가 역사 앞에서 절대 내가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싸워야 할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걸 배웠어요. “역사는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란 말이 있잖아요. 제가 역사를 전공하고 여태껏 가르치면서 늘 말하는 건, 역사는 희생과 헌신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꼬문: 은퇴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동애: 알 수 없네요. 내년에 교원지위가 확보되면 어느 정도 끝날 줄 알았는데, 서정민 열사의 염원까지는 지켜드려야 다 내려놓고 쉴 수 있을 것같아요. 그때까지는 해야죠.


    이제 2015년도 마지막 달에 접어들었다. 내년이면 선생님의 싸움도 햇수로 10년에 접어든다.
    “제가 싸워보니 괴로워야 바뀌더라고요. 그냥 좋은 말로는 안 바꿔주더라고요. 아프다고 소리도 지르고, 잘못되었다고 난리를 쳐야 겨우 바뀌더라고요.” 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무언가를 바꾼다는 것. 참 쉽지 않은 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때까지는 하겠죠.”라며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는 선생님을, 감히 닮고 싶어지는 연말이다.

    “대학강사법 시행 유예, 그 이후…”

    강사 교원신분 인정하고, 강의 주9시간 강의를 주5시간으로 낮춰 해고 문제 해결해야…

    이광수 장창원 김동애 김영곤/마로니방송
    http://www.maroni.co/sbdl2/49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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