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한개마을에서 전주 한옥마을이 배울 점





  • 전주문화원의 11월 ‘주제가 있는 문화유적 답사’는 전주시가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옥마을사업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행사였다. 답사지는 경북 성주. 문화원 소속 회원들은 지난 27일 세종대왕자태실, 한개마을, 동방사지칠층석탑, 성주향교, 성주성산관 등 성주 일대에 산재한 문화유적지를 탐방했다. 특히 이 중에서 세종대왕자태실, 한개마을, 성주성산관은 전주와도 인연이 닿는 곳이다.

     

    전국 최대 규모로 유일하게 왕자태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세종대왕자태실은 최근 태실 보호를 위해 난간석을 새롭게 설치했는데, 조선 초기 태실 난간석의 형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전주 경기전 내 예종대왕태실 난간석을 그대로 본따 만들었다고 한다.

     

    한개마을은 500여년 동안 성산이씨가 대대로 살아온 전형적인 동성촌락으로, 한국의 대표적 돌담길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은 중요민속자료 제255호로 지정될 정도로 잘 보존된 곳이지만, 최근 관광객 유치를 위한 마을 개조사업으로 옛 모습을 다소 잃고 있어 전주 한옥마을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성산관은 중앙에서 내려온 관원이나 외국 사신들이 머무르던 곳으로, 1607년 목사 송영구가 지은 건물이다. 바로 이 송영구가 전주와 인연이 깊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일전에 은혜를 입은 송영구를 만나기 위해 한양에서 일부러 익산에 살던 송영구를 찾아왔고, 그 인연으로 현재 전주객사의 현판인 ‘풍패지관’이란 문구를 남기고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성산관은 최근에 다시 지은 것으로,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 세종대왕(世宗大王) 자(子) 태실(胎室)

     

    조선 왕실은 아이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길일과 길지를 택해 안태사를 보내 태를 묻게 했다. 이후 선왕과 선후는 각 4명, 왕과 왕비는 각 8명, 왕세자는 4명의 군사가 태실을 지켜야했다. 경계는 대왕태실은 300보, 왕세자의 태실은 200보로, 이 경계 밖의 수목을 기르는 곳까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태실의 설치는 군현 명호의 승격과 위상과도 밀접히 관련됐고, 영역확대 등의 특혜가 주어지는 경우도 많아 태실을 자기 지방에 유치하기 위해 지역 간 분쟁이 발생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세종대왕 자 태실은 세종의 적서 19왕자 중 첫째 문종을 제외한 18왕자와 원손인 단종 등 총 19기의 태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전체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은 방형의 연엽대석을 제외한 석물은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세조의 태실은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 가봉비를 태실비 앞에 세웠다.

     

    이곳은 조선 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며, 우리나라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조선왕실의 태실조성방식 변화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에는 철망으로 태실들을 보호했으나, 최근 사적에서 개별 보물로의 유물 승격을 추진하면서 난간석을 새롭게 설치했다. 이 난간석은 그 형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전주 경기전 내 예종대왕태실 난간석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예종대왕태실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볼만한 대목이다.

     

     

    #한개마을

     

    전통은 보존개념으로 접근할 때, 비록 원형은 아닐지언정 전형은 유지할 수 있다. 그 맛은 남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을 관광자원개념으로 접근할 때, 그 전통은 훼손되고 만다.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들어서고, 그러기 위해 뭔가는 사라져야 한다. 그것은 전통이라는 이름만을 간직한 새로운 현대식 건축물일 뿐이다.

     

    한개마을 내의 주택들은 문화재자료 제354호인 극와고택을 비롯해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이 참사 후 이곳에 터를 잡고 사립문을 북쪽으로 내고 평생을 은거한 북비교택,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교리댁 등 총 9동의 전통한옥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곳은 또한 한국의 대표적 돌담길을 간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통한옥들 사이로 자연석에 황토를 발라 쌓아올린 토석담 3000미터 정도가 유려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돌만으로 쌓은 단순 돌담길과는 달리 돌담에는 기왓장을 얹고 수키와로 이리저리 모양을 내기도 했다. 즐비한 고택과 유려한 돌담으로 인해 이곳은 지금도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그렇지만 최근 이 마을이 변화를 맞고 있다. 특히 올해 들어 마을의 모습을 가린다는 이유로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버드나무, 감나무 등이 여지없이 베어지고 있다. 여기저기 나무토막들이 즐비한 걸 보면 바로 얼마 전의 일로 여겨진다. 마을 일대에 즐비하던 들꽃도 대부분 제거되고 있다. 그 자리는 보기 좋은 외래종 꽃이 들어서고 있다. 파손된 돌담도 현대식으로 간단히 세워지고 있다. 깔끔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묻지 않은 돌담이다.

     

    아직까지는 주거목적의 건물만이 있지만, 관광을 위한 건물도 들어설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오래 전부터 터 잡고 살던 누군가는 또 이곳을 떠나야 한다. 이곳 관계자는 “조금씩 사람냄새가 사라져가고 있다”며 “지금처럼 한다면 앞으로 5년이면 외지사람들이 이 마을을 찾을 이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전주 한옥마을도 관광객 숫자가 아닌 그만의 가치로 평가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 상기 s407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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