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산재(雙山齋)는 지은 지 200년이 넘은 전통 가옥으로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에 있다. 사랑채, 건너채(별당), 사당, 안채, 관리동, 별채, 서재 2동 등 9동의 건물과 호서정이라 불리는 정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해주 오씨 문양공 동경공파 26대손인 오경영(55세) 씨 부부가 이곳에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
쌍산재란(雙山齋) 이름은 오경영 씨의 고조부 온현우의 아호 쌍산(雙山)과 집재(齋)가 합해져 붙여진 이름이다. 오 씨는 “서재가 있는 집이라고 해서 ‘집재’를 쓴다고 설명하고 있다.
쌍산재가 있는 사도리는 본디 해주 오 씨 집성촌이다. 해주 오 씨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1,000년이 넘었고, 오경영 씨 집안은 5대조인 오현우가 이 마을에 처음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경영 씨는 오현우의 6대손이 된다.
쌍산재에 거주했던 오 씨 집안은 전통적으로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다. 지금은 두 부부만 남았지만 가족이 많을 때는 4대 30여 명이 함께 모여 산 적도 있다. 집안일을 거드는 일꾼과 글을 배우러 온 학생들을 합하면 그 수가 더 많을 때도 있었다.
쌍산재는 인근 지역의 기초 교육기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학생들은 물론 멀리 떨어진 지역 학생들까지 받아 들여 교육과 숙식을 책임졌다.
오현우 씨는 “그 때 어머님들의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가부장제도가 전통인 시대에 가사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여성들에게 있었다. 그러니 가족과 친족, 학당 학생들을 뒷바라지 했던 여성들의 희생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오 씨는 쌍산재를 개방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그 고민은 선대와 자신이 나고 자란 쌍산재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가에 대한 것이었다. 고민 중에도 집을 그냥 방치하면 허물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오 씨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래 보존하려면 사람들의 왕래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고택을 방문객들에게 개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수가 필요했다. 오 씨는 6개월 동안 고택의 보수에 매달렸다. 오 씨가 고택의 보수에 매달리기 시작하자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오 씨는 그때 상황을 “몸이 힘든 것이 아니라 귀가 시끄러웠다”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그 당시만 해도 고택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 할 때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광산업에서 문화의 정체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 한 시기였다.
오 씨의 결정이 옳았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깨닫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불과 7~8년 전이다. 당시부터 전통가옥에 대한 국민들이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전통가옥을 찾는 이들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 씨는 “내가 원하는 목적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이 집은 내 뿌리이기 때문에 보존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집을 수리 복원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전통가옥과 쌍산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우리나라 고택들은 형식은 거의 비슷하다. 대문을 지나면 사랑채, 행랑채 나오고 안채가 있고, 일정한 공간 내에 집약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쌍산재는 그 구조가 독특하다. 집안에 들어오기 전 밖에서 머뭇거리던 사람도 일단 대문을 들어서면 끝까지 가게 되어 있는 곳이 바로 쌍산재다”
사실, 쌍산재는 일반 가옥으로 보기에는 그 면적이 너무 넓고 규모도 꽤 크다.
건물의 배치를 살펴보면,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우측에 사랑채, 별당, 안채, 별채, 사당이 있고 좌측에 관리동이 있다. 원래 관리동 자리에 부속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워낙 낡은 탓에 보수를 해도 유지가 불가능해 지금의 관리동으로 개조했다. 관리동 바로 위에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별채가 있다. 별채는 원래 건물이 있던 자리였는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복원 차원에서 별채를 지었다고 한다.
별채를 지나면 대숲이 나오고, 대숲을 지나면 호서정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호서정을 지나면 양쪽으로 넓은 잔디밭이 있고 쌍산재 끝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과 서재 두 동이 있다. 서재를 들어서기 전 좌측 길로 가면 작은 대문이 보이고 대문을 열면 연못이 나온다. 그런데 연못이라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커 작은 저수지라 불릴 만하다.
넓은 잔디밭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다. 전통가옥에서 이렇게 넓은 잔디밭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물기 때문이다. 오 씨는 잔디밭에 대한 얘기도 들려주었다. 잔디밭으로 조성된 이곳은 원래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이 뛰어 놀던 공간이었다. 농토가 귀하던 시절 땅을 묵혀둘 수 없어 여름 한철 밭작물을 심었다가 빨리 수확한 다음 서당 아이들의 놀이터로 활용했다고 한다.
오 씨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훈은 ‘집안 화목’이다. 대가족이 살다보니 화목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목하지 않았다면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한 집에서 모여 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오 씨는 안채에 있는 뒤주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먹을 것이 부족해 춘궁기를 넘겨야 했던 시절 뒤주는 동네 사람들을 규휼 하는 역할을 했다. 식량이 부족한 사람들이 필요한 양 만큼 뒤주에 있는 곡식을 사용하고, 그 해 농사를 지어 가져간 만큼 뒤주에 채워 넣었다. 물론 이자는 받지 않았다. 당시 뒤주는 안채에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쌍산재는 역사적 측면이나 문화사적 측면 그리고 지역 관광 활성화 차원에서 좀 더 검토해 볼 가치가 있는 장소로 여겨진다.
쌍산재는 영상 취재로 이루어졌다. 더 궁금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