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여수지역 5·18백일장 수상작

  • 심  사  평

    심사위원장 하  병  연
     200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이학박사,
     여수지역 갈무리 문학회·산문시사 문학회 활동

     문학은 어떤 사건에 대한 보고서와는 다르다. 역사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막과 교훈은 관련 역사서나 연구논문을 탐독하면 된다. 요즈음에는 인터넷에서 관련 내용을 검색하면 백과사전이나 블로그 등에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편리하다. 문학은 인간의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보고서는 감동보다는 차가운 머리가 우선이고 문학은 차가운 머리보다는 따뜻한 가슴을 우선시한다.
     문학의 말은 일상의 말에서 출발하지만 일상의 말 그 자체는 아니다. 일상의 말 그대로 썼다가는 정서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여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그래서 상상을 잣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가장 보편적인 장치가 비유와 상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하지 말고 보여주어야 한다. 5·18에 대해 말하지 말고 5·18에 대해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분노라는 단어를 직접 쓰지 말고 글을 통해 독자들이 분노를 느끼게 하는 문장을 적으라는 것이다. 즉,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정의 모습을 어떤 대상물에 침투시켜 비유와 상징을 통해 의미 확장을 시키라는 말이다.
     본선에 올라온 시와 산문은 대부분 문학의 분야에 들지 않아 답답하였다. 하지만 아직 배우는 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가능성이 보이는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이번의 계기로 문학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가지기를 바라며 청소년 시기에 많은 책을 읽어주길 바란다.

     

     

     

     

     

     

     

    <시부> 고등부 대상

    5월의 음성 

     주현종
    한영고등학교 2학년 6반

     

    5월은
    남녁의 5월은
    우리 가슴으로 먼저 온다
    눈부신 하늘이 전한다.
    들판의 바람이 외친다.

    ‘우리는 잠든게 아니다
    눈 감은 채
    보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가릴 수 없는
    칼날 같은 진실을
    무너지지 않는 무등산이
    흔들리지 않는 금남로가
    말하고 있다.

    오, 그 날
    암흑 같은 어둠속에서
    피흘린 자유여! 민주여!
    거친 뿌리로 뻗어가는 민주화의 꽃을 본다.

    살아서 죽 은자의 변명보다
    죽어서 산 자의 음성을 보는
    역사의 푸른 눈

    ‘우리는 살아있다.’
    5월의 꽃이 되어
    저마다의 가슴에서
    뜨겁게 피어난다.

     


    <시부> 중등부 대상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주현영
    여수여자중학교 1학년 5반

     

    현장학습으로 찾아간
    망월동 국립묘지
    국화 한 송이를 바쳤다.
    묘비마다
    새겨진 이름들을
    쓰다듬으며
    묵념을 올렸다.

    아무 죄없이
    쓰러져간 사람들이
    너 나 없이
    우르르 몰려나와
    가슴을 치는 듯 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빗돌이 젖었다.
    가신 님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국화 송이도
    숨죽여 울고 있었다.


    <시부> 초등부 대상


    5월의 아픔


    전윤성
    여수좌수영초등학교 5학년 4반

     


                        말로만 아빠께 들었던
                        29년 전 5월의 봄
                        의로운 민주항쟁을 하다가
                        처참하게 죽어간
                        광주의 학생들과 시민들
                        너릿재 어디쯤엔가
                        아직도 통곡소리 들리는듯한데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목숨으로
                        지켜낸 우리의 고장
                        광주!
                        참 많이도 아팠겠다
                        참 많이도 아팠겠어

     

     

     

     

     

     

     


    <산문부> 고등부 대상

      찬란했던  5월, 아름다운 광주여! 

                                                김예린
                                                 전남과학고등학교 2학년 1반


    - 참으로 아름다운 5월 -

    참으로 아름다운 5월,
    모든 꽃 봉우리 피어날 때,
    나의 가슴속에도
    사랑이 싹텄네.

    참으로 아름다운 5월,
    모든 새들이 노래 부를 때,
    나의 그리움과 아쉬움
    그녀에게 고백했네.


    독일의 시인 하이네의 시처럼 5월은 연인들의 수줍은 사랑이 피어나고, 아카시아 진한 향기가 듬뿍 담긴 영롱한 아침이슬은  싱그러운 잔디위에 뒹군다.
    대학졸업반인 그녀는 도서관에 가기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제법 뜨거워진 햇살을 가려주는 포플러 가로수 길을 걸으면서 잠시 상념에 젖는다. 다른 친구들처럼 교직으로 나가야 할지, 아님 대학원 진학을 결정해야 할지. 저 멀리 웅장한 캠퍼스 건물들이 하나 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 길도 곧 추억으로 변하려니 싶어 더욱 애틋해진다.
    정문 앞에는 평소보다 많은 학생들이 무리지어 있다. 어제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학생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휴교령 등 민주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더니 무슨 일인가 싶어 마음이 다급해진다. 자세히 보니 정문은 굳게 닫혀있고 낯익은 제복들이 두 줄 세 줄로  빙 둘러 교문 앞을 가로 막고 있다.  학생들 수는 순식간에 불어났고  이곳 저곳 에서는 몸싸움이 벌어진다. 갑자기 저쪽에서 와하는 함성이 들리더니 학생들이 몰려가기 시작한다. 한 제복이 내리친 곤봉에 학생이 맞아 피를 쏟았고 흥분한 학생들이 돌을 던지면서 순식간에 투석전이 벌어졌다.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29년 전, 당시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5월 18일 전남대생 200여명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였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보고 합세한 시민들과 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역사적인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다.
     5월 19일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고,  5월 20일 20만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기에 이른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 십 여명이 사망하였으며,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나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하였다.
     5월 22일 시민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차지 '5.18사태 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협상 거부로 협상이 결렬되고 27일 계엄군의 총공세로 많은 희생자를 낸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린다.
     숨 가쁘게 돌아갔던 10 여 일간의 기록을 보며 역사의 현장에 마치 내가 있었던 것처럼 흥분과 전율이 느껴졌다. 
      매년 5월이면 들려주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사건은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이 아니라 불법적으로 집권을 획책하는 신군부 세력을 거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 봉기임을 깨닫게 되었고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투쟁이었음 알게 되었다.
    5.18 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 엄마는 무척 많이 우셨다.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죄책감, 가혹한 현실에 대한 분노등 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역사의 패배자들이 아니라 주인공들이다. 어둠을 넘어 희망을 열어온 산증인들이며 자신의 본분을 다해 온 민초들이다.      사랑하는 가족, 연인, 친구를 위해 총칼을 들어야만 했던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시민들이었고 불의에 항거하는 그들의 모습은 위대한 역사의 귀감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숨 쉬는 자유와 민주, 이런 것들이 어떤 한 영웅에 의해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이 피땀 흘린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그들은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 넝쿨장미가 앞 다투어 봉우리를 내밀던 그 봄, 광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는지  기억해주는 친구들은 많지 않다.
     단지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남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이라고 기록된 활자로만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한다. 총칼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선 피의  저항이 있었기에 오늘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기억해야한다. 한치 앞을 알 수 없었던 당시의 암울한 현실에서 나라의 주인인 민중이 주인답게 존중되는 사회를 향한 광주시민들의 외침을.
    다행히 ‘청소년 민주주의 역사캠프’나 ‘ 5.18 청소년 문화제’등을 통해 우리 청소년들이 교과서로만 배웠던 현대사의 장면들을 직접 체험하고 깨닫게 하는 프로그램도 생겼지만 진실을 제대로 알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역사는 잊으면 반복된다고 했다. 국가의 민주와 인간의 권리가 얼마나 고귀한지 온 몸으로 외쳤던 그 때의 교훈을 배워  5월의 정신을 올곧게 계승해야 하는 것이 우리 자라나는 세대의 사명이라 여겨진다. 

     

     <산문부> 초등부 대상

    오월의 함성

     정재훈
             한려초등학교 6학년 5반


    그 함성 지금까지 우리의 귀에 맴돌고 있다. 2년 전 나는 엄마와 함께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 당시의 나는 민주화가 무엇인지, 또 5ㆍ18의 민주화 운동이라는게 무슨 일인지 잘 알지 못했다.
    영화와 그리고 엄마께 들은 삼촌의 영화 같은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화려한 휴가’라는 그 영화는 당시의 민주화를 위해 싸운 광주시민군과 계엄군과의 대치한 모습을 재현하듯 상황들이 생생한 느낌으로 나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무언가 모를 분노와 또 슬픔이 나의 마음을 감싸고 있었다.
    1980년 5월18일 계엄군은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짖밟고 죽였다. 계엄군은 바로 나라를 지키고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는 우리의 국군이었다. 그런데 당시 광주에 주둔한 군인은 입에 오르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군인이라 감히 할 수 없었다. 학생을 시민을 그리고 심지어 생명을 잉태할 임산부까지 도저히 눈으로 볼 수 없는 광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설마 거짓일거라 생각도 들어 엄마한테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저렇게 연기를 과하게 하는 거라고 물어 보았지만 엄마는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고 하였다. 당시 엄마는 고3이었다고 한다. 고3인데 학교도 휴교된 상태라 가지 못하고 그저 집안에 틀어박혀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만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치 전쟁같은 암흑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내가 당시에 계엄군의 모진 상황들을 봤다면 영화 속 고등학생인 그 형처럼 나도 민주화에 동참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뿐이 아니다 당시 외삼촌은 대학 4학년이었다. 외삼촌도 이러한 끔찍한 비극을 겪은 사람 중 한 사람이다.영화 속 이러한 끔찍한 만행을 직접 본 삼촌은 하루 빨리 광주를 떠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는 이미 계엄군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때였다. 2명의 계엄군이 삼촌을 쳐다보자 삼촌은 앞 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앞만 보고 도망을 갔다. 하지만 삼촌 앞엔 태산과도 같은 큰 장벽이 삼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바로 역사의 높다란 철그물망이었다. 도저히 평상시에는 그 높은 철그물담을 넘는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 높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계엄군한테 잡히면 개죽음이 될 걸 생각하니 어떤 초인적인 힘이 삼촌을 이끌었고 삼촌은 무사히 그 회오리바람과 같은 역사의 쇠그물담을 뛰어 넘었던 것이다. 삼촌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났다 삼촌의 경험담만 듣더라도 당시 상황이 얼마니 급박하게 돌아갔는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계엄군에게서 멀어져온 삼촌은 그길로 산을 타고 이틀을 꼬박 걸어서 목포 외할머니집에 도착했었다고 한다.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서 많은 광주시민과 학생들이 처참이 매일매일 죽어만 갔다. 또 하나의 예로는 내 친구의 아버지도 당시 그 현장에서 있다 수류탄 파편이 발에 맞는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광주시민들은 이러한 상황을 본 후 더 격분해져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은 민주화란 단어로 꽁꽁 묶이게 되었다. 지금도 그 상처의 흔적이 당시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총,칼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오직 ‘민주화’ 이 한 글자를 위해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하나가 되어 피를 흘려갔다. 이렇게 흘린 값진 피 때문에 오늘 날 우리나라가 빨리 민주화를 되찾게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우리와 같은 상황을 겪는 나라가 있다. 바로 태국이다. 당시의 우리들의 상황과 같이 전두환 전 대통령은 모든 방송매체를 차단시켰다 그래서 광주는 세계 속의 외로운 섬처럼 모든 것이 고립시켜져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외신기자들은 발빠르게 소식을 전달하여 국내정세를 우리가 먼저 알기보다 외국방송에서 끔찍한 광주의 비극이 화면에 비쳐지고 있었다. 우리도 지금 마찬가지 아닐까 태국의 사태를 속속들이 텔레비전과 화면을 통해 또는 신문 외신 기사를 통해 낱낱이 알 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시 광주는 수류탄 탱크로 그리고 총성과 피비린내로 1981년5월 광주에서 모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반면 서울에서는 한가이 봄 나들이와 꽃 축제가 연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광주시민들이 흘린 피는 물거품이 되지 않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그렇다. 그 피비린내는 우리의 역사상 길이 민주화의 표상으로 남을 것이다. 한 편의 영화 민주화의 의미와 광주 시민의 목소리를 생생히 들려주고 있었다. 내 다음의 후세들도 광주 민주화운동은 역사에 길이 남아 민주화를 위해 흘린피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앞으로는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죽이는 분쟁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6ㆍ25의 아픔도 채 치유되지 않은 채 또 다시 같은 민족끼리 총 칼을 앞세워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는 것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 그 무언가 말이다. 광주시민들의 민주화를 외친 그 뜨거운 피와 함성이 지금도 나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있다.                    


     


     

     

    심  사  평

    심사위원장 하  병  연
     200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이학박사,
     여수지역 갈무리 문학회·산문시사 문학회 활동

     문학은 어떤 사건에 대한 보고서와는 다르다. 역사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막과 교훈은 관련 역사서나 연구논문을 탐독하면 된다. 요즈음에는 인터넷에서 관련 내용을 검색하면 백과사전이나 블로그 등에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편리하다. 문학은 인간의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보고서는 감동보다는 차가운 머리가 우선이고 문학은 차가운 머리보다는 따뜻한 가슴을 우선시한다.
     문학의 말은 일상의 말에서 출발하지만 일상의 말 그 자체는 아니다. 일상의 말 그대로 썼다가는 정서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여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그래서 상상을 잣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가장 보편적인 장치가 비유와 상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하지 말고 보여주어야 한다. 5·18에 대해 말하지 말고 5·18에 대해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분노라는 단어를 직접 쓰지 말고 글을 통해 독자들이 분노를 느끼게 하는 문장을 적으라는 것이다. 즉,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정의 모습을 어떤 대상물에 침투시켜 비유와 상징을 통해 의미 확장을 시키라는 말이다.
     본선에 올라온 시와 산문은 대부분 문학의 분야에 들지 않아 답답하였다. 하지만 아직 배우는 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가능성이 보이는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이번의 계기로 문학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가지기를 바라며 청소년 시기에 많은 책을 읽어주길 바란다.

     

     

     

     

     

     

     

    <시부> 고등부 대상

    5월의 음성 

     주현종
    한영고등학교 2학년 6반

     

    5월은
    남녁의 5월은
    우리 가슴으로 먼저 온다
    눈부신 하늘이 전한다.
    들판의 바람이 외친다.

    ‘우리는 잠든게 아니다
    눈 감은 채
    보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가릴 수 없는
    칼날 같은 진실을
    무너지지 않는 무등산이
    흔들리지 않는 금남로가
    말하고 있다.

    오, 그 날
    암흑 같은 어둠속에서
    피흘린 자유여! 민주여!
    거친 뿌리로 뻗어가는 민주화의 꽃을 본다.

    살아서 죽 은자의 변명보다
    죽어서 산 자의 음성을 보는
    역사의 푸른 눈

    ‘우리는 살아있다.’
    5월의 꽃이 되어
    저마다의 가슴에서
    뜨겁게 피어난다.

     


    <시부> 중등부 대상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주현영
    여수여자중학교 1학년 5반

     

    현장학습으로 찾아간
    망월동 국립묘지
    국화 한 송이를 바쳤다.
    묘비마다
    새겨진 이름들을
    쓰다듬으며
    묵념을 올렸다.

    아무 죄없이
    쓰러져간 사람들이
    너 나 없이
    우르르 몰려나와
    가슴을 치는 듯 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빗돌이 젖었다.
    가신 님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국화 송이도
    숨죽여 울고 있었다.


    <시부> 초등부 대상


    5월의 아픔


    전윤성
    여수좌수영초등학교 5학년 4반

     


                        말로만 아빠께 들었던
                        29년 전 5월의 봄
                        의로운 민주항쟁을 하다가
                        처참하게 죽어간
                        광주의 학생들과 시민들
                        너릿재 어디쯤엔가
                        아직도 통곡소리 들리는듯한데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목숨으로
                        지켜낸 우리의 고장
                        광주!
                        참 많이도 아팠겠다
                        참 많이도 아팠겠어

     

     

     

     

     

     

     


    <산문부> 고등부 대상

      찬란했던  5월, 아름다운 광주여! 

                                                김예린
                                                 전남과학고등학교 2학년 1반


    - 참으로 아름다운 5월 -

    참으로 아름다운 5월,
    모든 꽃 봉우리 피어날 때,
    나의 가슴속에도
    사랑이 싹텄네.

    참으로 아름다운 5월,
    모든 새들이 노래 부를 때,
    나의 그리움과 아쉬움
    그녀에게 고백했네.


    독일의 시인 하이네의 시처럼 5월은 연인들의 수줍은 사랑이 피어나고, 아카시아 진한 향기가 듬뿍 담긴 영롱한 아침이슬은  싱그러운 잔디위에 뒹군다.
    대학졸업반인 그녀는 도서관에 가기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제법 뜨거워진 햇살을 가려주는 포플러 가로수 길을 걸으면서 잠시 상념에 젖는다. 다른 친구들처럼 교직으로 나가야 할지, 아님 대학원 진학을 결정해야 할지. 저 멀리 웅장한 캠퍼스 건물들이 하나 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 길도 곧 추억으로 변하려니 싶어 더욱 애틋해진다.
    정문 앞에는 평소보다 많은 학생들이 무리지어 있다. 어제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학생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휴교령 등 민주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더니 무슨 일인가 싶어 마음이 다급해진다. 자세히 보니 정문은 굳게 닫혀있고 낯익은 제복들이 두 줄 세 줄로  빙 둘러 교문 앞을 가로 막고 있다.  학생들 수는 순식간에 불어났고  이곳 저곳 에서는 몸싸움이 벌어진다. 갑자기 저쪽에서 와하는 함성이 들리더니 학생들이 몰려가기 시작한다. 한 제복이 내리친 곤봉에 학생이 맞아 피를 쏟았고 흥분한 학생들이 돌을 던지면서 순식간에 투석전이 벌어졌다.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29년 전, 당시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5월 18일 전남대생 200여명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였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보고 합세한 시민들과 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역사적인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다.
     5월 19일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고,  5월 20일 20만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기에 이른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 십 여명이 사망하였으며,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나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하였다.
     5월 22일 시민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차지 '5.18사태 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협상 거부로 협상이 결렬되고 27일 계엄군의 총공세로 많은 희생자를 낸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린다.
     숨 가쁘게 돌아갔던 10 여 일간의 기록을 보며 역사의 현장에 마치 내가 있었던 것처럼 흥분과 전율이 느껴졌다. 
      매년 5월이면 들려주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사건은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이 아니라 불법적으로 집권을 획책하는 신군부 세력을 거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 봉기임을 깨닫게 되었고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투쟁이었음 알게 되었다.
    5.18 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 엄마는 무척 많이 우셨다.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죄책감, 가혹한 현실에 대한 분노등 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역사의 패배자들이 아니라 주인공들이다. 어둠을 넘어 희망을 열어온 산증인들이며 자신의 본분을 다해 온 민초들이다.      사랑하는 가족, 연인, 친구를 위해 총칼을 들어야만 했던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시민들이었고 불의에 항거하는 그들의 모습은 위대한 역사의 귀감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숨 쉬는 자유와 민주, 이런 것들이 어떤 한 영웅에 의해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이 피땀 흘린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그들은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 넝쿨장미가 앞 다투어 봉우리를 내밀던 그 봄, 광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는지  기억해주는 친구들은 많지 않다.
     단지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남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이라고 기록된 활자로만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한다. 총칼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선 피의  저항이 있었기에 오늘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기억해야한다. 한치 앞을 알 수 없었던 당시의 암울한 현실에서 나라의 주인인 민중이 주인답게 존중되는 사회를 향한 광주시민들의 외침을.
    다행히 ‘청소년 민주주의 역사캠프’나 ‘ 5.18 청소년 문화제’등을 통해 우리 청소년들이 교과서로만 배웠던 현대사의 장면들을 직접 체험하고 깨닫게 하는 프로그램도 생겼지만 진실을 제대로 알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역사는 잊으면 반복된다고 했다. 국가의 민주와 인간의 권리가 얼마나 고귀한지 온 몸으로 외쳤던 그 때의 교훈을 배워  5월의 정신을 올곧게 계승해야 하는 것이 우리 자라나는 세대의 사명이라 여겨진다. 

     

     <산문부> 초등부 대상

    오월의 함성

     정재훈
             한려초등학교 6학년 5반


    그 함성 지금까지 우리의 귀에 맴돌고 있다. 2년 전 나는 엄마와 함께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 당시의 나는 민주화가 무엇인지, 또 5ㆍ18의 민주화 운동이라는게 무슨 일인지 잘 알지 못했다.
    영화와 그리고 엄마께 들은 삼촌의 영화 같은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화려한 휴가’라는 그 영화는 당시의 민주화를 위해 싸운 광주시민군과 계엄군과의 대치한 모습을 재현하듯 상황들이 생생한 느낌으로 나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무언가 모를 분노와 또 슬픔이 나의 마음을 감싸고 있었다.
    1980년 5월18일 계엄군은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짖밟고 죽였다. 계엄군은 바로 나라를 지키고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는 우리의 국군이었다. 그런데 당시 광주에 주둔한 군인은 입에 오르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군인이라 감히 할 수 없었다. 학생을 시민을 그리고 심지어 생명을 잉태할 임산부까지 도저히 눈으로 볼 수 없는 광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설마 거짓일거라 생각도 들어 엄마한테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저렇게 연기를 과하게 하는 거라고 물어 보았지만 엄마는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고 하였다. 당시 엄마는 고3이었다고 한다. 고3인데 학교도 휴교된 상태라 가지 못하고 그저 집안에 틀어박혀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만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치 전쟁같은 암흑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내가 당시에 계엄군의 모진 상황들을 봤다면 영화 속 고등학생인 그 형처럼 나도 민주화에 동참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뿐이 아니다 당시 외삼촌은 대학 4학년이었다. 외삼촌도 이러한 끔찍한 비극을 겪은 사람 중 한 사람이다.영화 속 이러한 끔찍한 만행을 직접 본 삼촌은 하루 빨리 광주를 떠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는 이미 계엄군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때였다. 2명의 계엄군이 삼촌을 쳐다보자 삼촌은 앞 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앞만 보고 도망을 갔다. 하지만 삼촌 앞엔 태산과도 같은 큰 장벽이 삼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바로 역사의 높다란 철그물망이었다. 도저히 평상시에는 그 높은 철그물담을 넘는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 높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계엄군한테 잡히면 개죽음이 될 걸 생각하니 어떤 초인적인 힘이 삼촌을 이끌었고 삼촌은 무사히 그 회오리바람과 같은 역사의 쇠그물담을 뛰어 넘었던 것이다. 삼촌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났다 삼촌의 경험담만 듣더라도 당시 상황이 얼마니 급박하게 돌아갔는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계엄군에게서 멀어져온 삼촌은 그길로 산을 타고 이틀을 꼬박 걸어서 목포 외할머니집에 도착했었다고 한다.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서 많은 광주시민과 학생들이 처참이 매일매일 죽어만 갔다. 또 하나의 예로는 내 친구의 아버지도 당시 그 현장에서 있다 수류탄 파편이 발에 맞는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광주시민들은 이러한 상황을 본 후 더 격분해져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은 민주화란 단어로 꽁꽁 묶이게 되었다. 지금도 그 상처의 흔적이 당시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총,칼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오직 ‘민주화’ 이 한 글자를 위해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하나가 되어 피를 흘려갔다. 이렇게 흘린 값진 피 때문에 오늘 날 우리나라가 빨리 민주화를 되찾게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우리와 같은 상황을 겪는 나라가 있다. 바로 태국이다. 당시의 우리들의 상황과 같이 전두환 전 대통령은 모든 방송매체를 차단시켰다 그래서 광주는 세계 속의 외로운 섬처럼 모든 것이 고립시켜져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외신기자들은 발빠르게 소식을 전달하여 국내정세를 우리가 먼저 알기보다 외국방송에서 끔찍한 광주의 비극이 화면에 비쳐지고 있었다. 우리도 지금 마찬가지 아닐까 태국의 사태를 속속들이 텔레비전과 화면을 통해 또는 신문 외신 기사를 통해 낱낱이 알 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시 광주는 수류탄 탱크로 그리고 총성과 피비린내로 1981년5월 광주에서 모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반면 서울에서는 한가이 봄 나들이와 꽃 축제가 연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광주시민들이 흘린 피는 물거품이 되지 않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그렇다. 그 피비린내는 우리의 역사상 길이 민주화의 표상으로 남을 것이다. 한 편의 영화 민주화의 의미와 광주 시민의 목소리를 생생히 들려주고 있었다. 내 다음의 후세들도 광주 민주화운동은 역사에 길이 남아 민주화를 위해 흘린피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앞으로는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죽이는 분쟁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6ㆍ25의 아픔도 채 치유되지 않은 채 또 다시 같은 민족끼리 총 칼을 앞세워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는 것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 그 무언가 말이다. 광주시민들의 민주화를 외친 그 뜨거운 피와 함성이 지금도 나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있다.                    

    <여수시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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