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를 고독하게 하는 산, 수인산

  • 병영면

    <'전라병영성지‘ 표석과 ’수인산 관광 안내도‘>


    수인산은 강진군 병영면과 장흥군 유치면에 걸쳐있다. 높이는 561m이다. 산마루는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평평한 지역으로 헬기 한 대 정도 착륙할 수 있는 공간이다. 동, 서, 남쪽은 나무가 가로막아 산세나 주변 경관을 볼 수 없으나 북쪽은 칼벼랑으로 산등성이와 장흥군 유치면을 조망할 수 있다.


    수인산에는 수인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수인산성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축조한 성으로 조선시대에는 병마절도사에 소속되어 있었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 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기있는 산행코스는 다음과 같다.
    1코스 : 홈골저수지 → 오른쪽 능선 → 헬기장 → 수인산성남문 → 우물터 → 북문 → 수인산 → 도둑골 → 홈골저수지
    2코스 : 홈골저수지 → 왼쪽 계곡 → 정상 → 산성터 → 병풍바위 → 수인사 → 홈골저수지
    3코스 : 홈골저수지 → 홈골 → 정상(노적봉) → 병풍바위 → 수인사 → 홈골저수지


    오늘 산행 일정은 홈골저수지에서 출발하여 오른쪽 능선 → 헬기장 → 수인산성남문 → 우물터 → 북문 → 수인산 → 도둑골 → 홈골저수지로 회귀이다. 그러나 분기점에 세워진 이정표의 오류, 등산로 정비 부실, 산행 가이드의 착각으로 수인산 성곽을 따라 유치면까지 거의 다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다. 사고는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다고 했는데 오늘 산행은 우연이 겹친 고생길이었다. 이 기억만 아니라면 수인산 산행은 호젓하고 여유로운 산행이 되었을 것이다.


    수인산 산행 길은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코스였다. 우리들이 평소에 잊고 지냈던 외로움, 고독함을 마음 속 심연에서 끌어내고 또 이것들이 근원이 되어 사색에 잠기게 하는 힘을 가졌다. 직관적으로  이해되고 느낄 수 있는 월출산과는 크게 대비되는 산이었다.


    수인산은, 등산객 서너 명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담소를 나누며 걷는다면 정말 멋진 산행코스가 될 것이다.


    ‘홈골저수지’ 주차장에 주차한 후 수인산성 남문을 향해 산행을 시작했다. 시작은 좋았다. 능선의 굴곡이 완만하고  흙과 나뭇잎이 깔려 있는 산길은 그런대로 걸을 만 했다. 키가 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하게 자라고 있어 탁 트인 시야는 아니었다. 그러나 숲이 우거진 다른 산과 비교해, 머리 위로 뻥 뚫린 하늘과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 가끔 나무 틈사이로 보이는  주변 풍경들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산길>


    완만한 비탈길을 걷다보면 평탄지대가 나오고 그 다음엔 완만한 내리막이 나오고 다시 오르막길이 나왔다. 들머리에서 첫째 봉우리에 도착할 때까지 이런 길이 반복됐다. 마치 겁먹은 등산객을 유혹하거나 험한 산행을 위해 등산객을 워밍업 시키는 것 같았다.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산등성이에 앉아>

    30여 분쯤 올랐을까.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산등성이에 올랐다. 1평 남짓한 평평한 바위가 우리를 반긴다. 앞에는 강진군 작천면의 풍경의 지도처럼 들어오고 바위에 앉자 숲에 잠겨있는 병풍바위가 또렷하게 보인다.



    <한폭의 동양화 같은 중첩된 산등성이>


    10여 분을 더 올랐을까. 오른 쪽 길이 탁 트였다. 산의 머리를 지탱하고 있는 암반이다. 그곳에 서서 앞을 바라다보니 층층이 얽히고설킨 산등성이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 꾸물꾸물한 형상에 한동안 시선을 빼앗겼다. 흐린 날씨 탓에 반쯤 실루엣으로 보이는 산등성이는 영락없이 묵으로 그린 한 폭의 동양화이다.


    조금 더 걷자 높은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저 봉우리가 헬기장이 있는 곳이다. 송 씨는 저곳까지 단숨에 올라가자고 주문한다. 그러나 내가 단숨에 오를 수 있는 높이는 아닌 것 같다. 역시나, 예상처럼 만만한 길을 아니었다. 좁고 가파른 길의 연속이었다.


    가파른 길을 벗어나 평탄지대로 들어서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가치살무사가 길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통행세를 요구할 태세다. 여태까지 목격한 뱀 중에 가장 통통한 살무사 같다. 이런 뱀은 독성도 강한데... 어떻게 처리할까 잠깐 생각하는 사이, 등산객의 방해가 귀찮아졌는지 살무사는 금세 사라졌다.

    <헬기장을 벗어난 후 바라본 남문으로 가는 길>



    헬기장을 벗어나자 병풍바위까지 가는 숲길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나무로 가려진 그 속이야 들여다 볼 수 없었지만 거리와 난이도는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병풍바위

    <코 앞으로 다가온 병풍바위>

    <지금까지 걸어온 능선>

    병풍바위에 가까워지자 길 오른쪽으로 여태까지는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깎아지른 듯이 험한 벼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이견을 달 수 없는 천혜의 요새다. 이곳을 함락하겠다고 무모하게 오르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뼈도 못 추릴 것 같다. 이 칼벼랑 만으로도 능히 수천의 왜군을 막을 수 있었을 것 같다.

    부처손

    바위솔

    <부처손(바위손)과 바위솔>


    절벽 끝 바위에는 부처손(바위손)과 바위솔이 자라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내가 신기해하자 송씨는 이런 식물은 지천에 널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명하다는 인근 산에 올라가 봤지만 부처손과 바위솔을 봤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이곳의 생태환경이 건강하거나 이들이 자생하기에 좋은 자연환경일 것이다.

    <남문>


    인적이 끊긴 남문은 잡초만 무성하다. 나무를 한 짐 가득 진 지게꾼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입구는 옛날 성을 드나들던 민초들이 어떻게 이곳을 통행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상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남문에서 10M쯤 더 가자 기와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비록 소량이긴 하지만 이 기와 파편들은 이곳에 건물이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우물터>

    건물터에서 내려서자 이름 모를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등산객의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이런 길은 우물터가 있는 곳까지 계속되다가 풀이 자랄 수 없는 우물터에서 멈칫하더니 그 곳을 벗어나자 억센 풀길이 다시 발길을 막아섰다. 이정표를 보고 출발했으나 사람이 통행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리 저리 길을 찾아보다가  결국 풀이 어깨까지 자란 길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는데 물이 흐르던 계곡이었다. 미끄러운 계곡을 벗어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가시 돋은 풀들이 우리를 공격한다. 천신만고 끝에 초림지대를 지나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등산로 정비가 잘 된 길이 나타났다. 북문으로 하산하거나 수인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는 분기점이었다.
    ‘아! 이런 배신감...’


    강진군과 장흥군의 영토분쟁(?)으로 등산로를 정비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제초작업을 했는데도 다시 풀이 무성하게 자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물터를 벗어날 수 있는 등산로 입구를 찾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산행에서 겪은 두 번의 실수 중 첫 번째 실수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라서 나는 하산하자고 했고 송씨는 수인산 정상을 통과하면 더 좋은 하산 길이 있으나 수인산 정상을 가자고 했다. 둘은 수인산 정상을 오른 다음 하산하기 쉬운 길을 택하기로 했다.


    수인산 산허리에 오르자, 금방 소나기라도 퍼 부울 것 같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햇살이 비쳤다.  자갈 보다는 크고 바위 부스러기 보다는 작은 돌 부스러기와 흙으로 조성된 길은 그다지 오르기 어렵지는 않았다.


    수인산 정상

    <수인산 표지석>

    수인산 정상이 가까워 오자 송씨는 한달음에 정상으로 내 달렸다. 나도 뒤를 따랐다. 길 왼쪽에는 봉화대의 축소판처럼 만들려다 만 돌무더기가 보였다. 조금 더 오르자 수인산이란 표석이 세워진 평탄지대가 나타났다.



    정상에서 찰밥과 콩을 섞어 만든 김밥 한 덩어리를 손에 들고 맛있게 먹었다. 그 동안 날씨는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한두 방울 빗방울도 떨어졌다.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  표석 앞에서 인증샷. 그리고 정상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흥 유치면과 능선만 보인다.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그리고 생각했던 전망과는  차이가 많았다.

    <유치면으로 인도한 이정표>

    수인산 정상에서 내려오다 첫 이정표를 만날 때까지는 그런대로 길이 좋았다. 분기점에 도착하자 이정표가 가리키는 주차장 방향을 향해 하산을 시작했다. 그 길을 따라 앞으로 진행할수록 뭔가 속은 느낌이 든다. 하산 길이 좋다고 했는데 허물어지고 들쭉날쭉한 성곽을 따라 이동해야 하는 험한 길이었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잡고 내려가야 하는 길도 많았다.



    1시간 정도를 내려갔을까 주변의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송씨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돌아가자고 한다. 나는 그냥 내려가자고 했다. 그런데 앞으로 갈수록 길은 험해지고 전혀 다른 지형이 눈앞에 펼쳐진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곳으로 가면 장흥 유치면으로 가는 길이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홈골저수지인데 말이다. 원래의 목적지로 하산할 수 있는 분기점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내려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다시 올라가야 하다니. 정말 죽을 맛이다. 날을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러다 119불러서 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이다. 둘 다 랜턴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씨는 훨씬 앞서 사라지고 나는 오르다 쉬다를 반복하며 분기점을 향했다. 오던 길로 30분에서 1시간 정도를 걸었을까? 수인산 정상에서 내려오다 만난 분기점 표시가 있는 곳까지 왔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이정표 방향이 틀렸다. 이곳을 자주 왔다는 송씨도 이정표를 보고 목적지를 정하다가 실수를 한 것 같다.


    <하산 길, 마지막 힘을 다하고 있는 해>

    태양은 오늘의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곧 어둠이 닥칠 징조다. 내려가야 할 길은 먼데 해는 자꾸만 기울어져 간다. 걸음을 재촉하며 하산을 서둘렀다. 반쯤 내려왔을 것 같은데 해는 이미 서산 너머로 사라졌다. 길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1/3 쯤 내려오다 걸음 잘못 내디뎌 발목을 삐끗했다. 별로 심한 것 같지 않아 잠시 쉬고 걸음을 재촉했다. 주위의 사물들은 조금씩 형체를 잃어간다. 삔 발목과 어둠 때문에 몇 번 넘어질 뻔 했다. 홈골저수지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길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태풍 곤파스에 쓰러진 제법 큰 나무가 길을 막고 있다. 나무가 쓰러진 틈사이로 빠져 나갔다. 묘지가 보인다. 동네가 멀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동안 길은 희미한 윤곽만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걷다가 미끄러져 비탈로 넘어졌다. 얼굴도 따갑고 몸도 따갑다. 다행이 낮은 곳에서 넘어져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이때 멀리서 예취기 소리가 들려온다. ‘아! 이제 다 온 것 같다. ’


    숲을 빠져나오니 주변이 어둡더라도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아스팔트길만 따라가면 되니까. 10분 정도를 더 걸어서 주차한 장소에 도착했다. 할머니 두 분이 운동하러 나왔다가 길가에 앉아 쉬고 있었다. 감감해져서 하산하고 있는 우리를 보더니 “어두운데 어떻게 내려왔느냐”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이번 수인산 산행은 길고 호젓한 산길을 무척 많이 걸었다는 것. 길을 잘못 들어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했다는 것. 또 시간을 많이 소비했지만 산행 포인트를 알차게 정하지 못해 특정하게 내세울 수 있는 주제가 적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수인산 산행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간을 충분히 갖고 수인사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선택해 보고 싶다.

    <글ㆍ 사진 :  윤승현>

    • 관리자 news@jeo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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