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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최영진 강좌
  • 論語와 공자의 行蹟 1

  • 작성일 2016-05-10 12:10:02 | 수정일 2016-05-13 20:28:16
  • 論語와 공자님의 行蹟(행적)

    논어는 공자님의 말씀과 행실 또는 제자들과 제후들의 問答(문답)으로 이루어진 유가 최고의 경전으로 有子와 曾子의 제자들에 의하여 기록 되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말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책사인 유학자 李斯(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어 焚書坑儒(분서갱유)를 단행하였으므로 유가의 경전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러나 진나라가 패권정치를 하다가 3대 16년 만에 망하고 劉邦(유방)이 중국을 다시 통일하고 한나라를 세웠는데 그의 손자 한 무제가 思想(사상)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유학자인 董仲舒(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가를 유교로 받아들여 국교로 삼고 오경박사를 두어 유가 경전을 다시 편찬케 하였다. 그 때에 안창후와 장우가 魯나라 논어와 齊나라 논어를 비교하여 20편으로 찬정한 것이 지금의 논어이다.  

    史記(사기) “공자 세가에 기록하기를 공자의 이름은 丘(구)요 자는 仲尼(중니)이고 先代는 송나라 사람이다.” 하였다. 아버지는 가세가 빈약한 노나라 대부의 반열에 계시었는데, 나이 70이 되도록 후사를 이어줄 만한 아들이 없는 것을 늘 걱정하고 계시었는데, 친한 벗의 딸이 나이가 과년하도록 시집을 못 가자, 벗에게 자기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딸을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벗의 딸이 세 사람 있었는데 위로 두 딸은 단호히 거절했으나, 16세 된 막내딸이 자청하여 내가 가서 후사를 잇겠다고 하고 아버지인 叔梁紇(숙량흘)과 결혼하고, 尼丘山(니구산)에 올라가 하늘에 축원하여 공자님을 낳았다고 한다.

    이때가 魯나라 襄公(양공) 22년 11월 21일 창평현 추읍에서 태어나시니 기원전 551년이다. 공자님은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晝耕夜讀(주경야독)으로 학문을 연마하시고 몸을 닦고 德을 쌓으며 가난한 가정을 돌보며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19세 때 開官氏(개관씨)와 결혼하셨는데, 가세가 빈약하여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집이 가난하고 식구가 많은데 저와 결혼하시면 고생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좋다면 결혼합시다.” 하시고 승낙을 얻어 결혼하셨다.

    20세에 아들 孔鯉(공리)를 낳았는데 字는 伯魚(백어) 이다. 그 해에 노나라 창고 관리자가 되시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시니, 21세에는 다시 사육 담당 관리자가 되시어 가축을 잘 번식시켰다.

    24세 때에 어머니 안씨가 돌아가셨는데, 가세가 빈약하여 대부의 예로 장례를 치르지 못함을 심히 애통해 하셨다.

    27세에는 담자에게 옛 관재를 배우시니 그때부터 공자님의 學問과 德이 온 나라와 이웃 나라에 까지 소문이 나서, 제자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30세에 몸을 세우시고 周나라에 가서 주나라 史官(사관)인 老子에게 예를 배우고 돌아오시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34세에 처음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위나라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염유(冉有)가 말고삐를 잡고 모시었는데 따르는 제자가 7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공자님이 위나라에 이르러 수레에 계시면서 백성이 많으신 것을 보시고 혼자 하신 말씀이 “사람이 많기도 하다. 其庶矣(기서의)” 하시니, 염유가 그 말씀을 듣고 “선생님 사람이 많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공자님이 대답하시기를 “富之(부지) 백성을 부유하게 하여 衣食住生活(의식주생활)을 넉넉히 하여주어야 한다.” 하시었다. 염구가 또 묻기를 “이미 백성들이 부유하게 되면 또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敎之(교지),백성들을 가르쳐야한다.“ 하시며,” “사람이 禮義를 배우지 않으면 鳥獸(조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시며, 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처벌하는 것은 백성을 학대하는 것이다.” 하시었다.   

    공자님은 자로의 처형 안탁주 집에 거처를 정하고, 위나라 君主인 靈公(영공)을 뵙기를 청하였다. 賢者가 그 나라를 방문하여 뵙기를 청하면 만나보는 것이 당시의 禮儀였는데, 영공은 無道하여 만나주지 않자 그 다음 해 35세 때 노나라로 돌아 왔다. 당시 노나라는 계씨가 정권을 독단하고 있었는데, 君主인 昭公(소공)이 진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季氏(계씨)를 제압하려다 실패하고 齊나라로 달아나니 노나라가 어지러워지니, 공자님께서는 노나라를 떠날 것을 결심하고 제자들과 함께 제나라로 가서 제나라 大夫인 高召子(고소자)의 家臣이 되어 제자들을 가르치며 국정에도 관여 했는데. 제나라 君主인 景公(경공)과 통했다.   

    42세에 경공이 불려 政事(정사)를 물으니, 공자님이 대답하시기를 “임금은 임금 노릇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하고, 자식은 자식노릇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경공이 말하기를 참으로 진실한 말이다. “임금이 임금 노릇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못하고, 아비가 아비 노릇 못하고, 자식이 자식 노릇 못하면, 비록 곡식이 있다고 하나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시었다. 또 齊景公(제경공)이 공자를 신임하여 尼谷(니곡)의 땅을 주어 영주로 봉하고 정사를 함께하려고 했으나 대신인 안영이 극구 반대하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하는 말이 “내가 노나라 계씨와 맹씨의 중간으로 대우하고자 하나 나는 이미 늙었다.” 하시며 등용하지 못하였다.

    공자님은 떠날 때가 된 것을 알고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오니, 노나라를 떠난 지 실로 8년 만이요, 공자 나이 43세요, 노나라 定公 원년 (BC 509)이다. 그때 계씨가 노나라 정권을 독단하고 있었는데, 그의 가신인 양호가 난을 일으켜 계씨를 가두고 정사를 독단하였다. 공자님은 벼슬을 구하지 않으셧다.

    청송 haenam7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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