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최영진 강좌
  • 儒家의 道論 2(유가의 도론)

  • 작성일 2015-01-07 12:47:42 | 수정일 2015-01-07 19:40:16
  • 大學에서 [誠意(성의)를 無自欺(무자기)라 했다] 곧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일이라 했다. 이 자기는 본래 善한 자기이다. 그러한대 사실 모든 사회악의 근본 원인은 이 자기를 속이는 데서 비롯되며, 그 자기를 아주 망각해버린다면 인간은 그야말로 道具를 사용하는 동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유가의 중심과제를 자기 확립에 두어졌고 그 확립에 길이 뜻을 세우고 정성을 다하여 人間의 道를 행하는데 두었던 것이다.

    군자가 愼獨(신독) 곧 홀로 있을 때 삼가 한다는 것은 곧 誠意(성의)의 일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더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이며 곧 자기의 本性을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다. 때문에 군자가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은, 人慾(인욕)을 억제하고 邪惡(사악)을 제거하는 한편 善으로써 자기 내부를 충실케 하기 위해서다.

    愼獨(신독)은 그것이 誠意이면서 한편으로는 敬을 의미한다.

    칸트는 인간과 구별된 나와 타인의 人格에 대한 恭敬의 중요함을 강조했고, 조선조 선조 때의 大儒 李退溪는 생활을 主宰(주재)하는 것이 무엇인가의 질문에, 持敬(지경) 또는 居敬(거경)으로 대답했다. 효종 때의 김집은 愼獨(신독)을 그의 제호로 까지 했다. 易坤(역곤) 괘문 전언에 [敬으로 內心을 바로 잡고 義로써 外行을 바르게 한다]고 했으며 공자님은 [인간의 생은 直이다. 邪曲(사곡)되게 산다는 것은 요행을 면하는 것일 따름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이 지녀온 생의 본질은 直이라는 말이다. 직 그것은 본연적인 자기의 주체를 회복하는 것이며 또한 愼獨이 敬이란 말이다.

    敬(경) 靜(정) 誠(성)은 함께 自己回復의 삼대 要諦(요체)로 다루어졌으며 결국 愼獨은 본연의 자아를 회복 스스로의 온전한 주체가 되는 길이며 동시에 天에 理致을 행하는 길이다. 愼獨(신독) 誠意(성의) 敬(경) 따위는 결국 “誠者는 天地道也 誠之者는 人之道(성자는 천지도야 성지자는 인지도)다” 고한 그 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길이 誠之 곧 정성스럽게 되고자 하는 것이다.

     

    칸트(KANT) 독일의 철학자 (1724~1804)

    1)순수 이성 비판 2)실천 이성 비판 3)판단력 비판

    實踐理性批判(실천이성비판)에서 道德的(도덕적) 判斷의 根據를 形式的 道德律에 돌리고 實踐理性(실천이성)이 理性論(이성론)에 대한 우의를 주장하여 윤리학을 수립했다.

     

    李滉(이황) (1501~1570) 號는 退溪(퇴계)

    중종18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 때는 양관 대제학을 지냈고 이듬해 고향에 돌아와 학문과 후진 교육에 전심했다. 이언적의 主理說(주리설)을 계승하여 주자의 理氣二元論(이기이원론)을 주장 하면서도 理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그것을 더욱 발전 시켰으며 理氣互發說(이기호발)을 사상의 핵심으로 삼았다. 인간의 純粹理性(순수이성)은 절대 善이고 이에 따르는 것이 최고의 德이라 했다. 이러한 그의 학문은 유성용 김성일 정구 등에 계승 되었고 嶺南學派(영남학파)를 이룸으로써 李珥(이이)의 제자들에게 이루어진 畿湖學派(기호학파)와 대립하였다.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일본 유학에도 커다란 영항을 미쳤다. 저서로는 聖學十圖(성학십도) 自省錄(자성녹) 心經釋疑(심경석의) 退溪全書(퇴계전서)가있다.

    金集(김집) (1574~1656) 호는 愼獨齊(신독제)

    효종때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훈신 김자겸과 대립하여 낙향 예학을 연구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저서로는 愼獨齊遺稿(신독제유고)가 있다.

     

    李珥(이이) (1536~1584) 號는 栗谷(율곡): 명종3년 13세로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19세 때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서를 연구하다가 유학으로 전향 했으며 23세 때에 이황을 만났다. 명종19년 문과에 급제 후 선조 원년 천추사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춘추관 기사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판동령부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東西分黨의 조정을 위해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이황과 함께 조선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서 기호학파를 형성하였고 章句의 분석적 해설보다 근본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했으며 이황의 理氣二元論에 대하여 氣發理乘日途說(기발이승일도설)을 근본사상으로 한 理通氣局(리통기국)을 주장하였다. 10만 군대의 양성을 주장하였고 대동법과 社倉(사창)의 실시에 노력했다. 그림에도 능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저서에 栗谷傳書가 있다.

      性理學者 靑松 催 榮辰

    청송 haenam7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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