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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공예의 마지막 장인, ‘김육남’

  • 작성일 2012-04-26 22:25:43 | 수정일 2016-08-17 18:55:44
  • “내가 강진에서 옥동으로 온 해가 1969년이었을 거야.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이곳은 사람들이 넘쳐나던 마을이었어. 주막집이 10여 곳 있었고, 다방이 2곳, 주조장이 2곳 있었으니까 꽤 큰 마을이었지. 지금은 노인들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는 잠시 옛날을 회상하더니 말을 이어간다.
    “당시 이곳에는 옥공예를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내가 면장 월급보다 더 많이 벌었으니까 수입은 괜찮은 편이었지. 옥공예품은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했는데 농사를 짓는 사람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어. 그때 이 마을에 옥공예 점포가 15곳 정도 됐나? 한 점포에 15명 정도가 일했으니까, 이 일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대략 150~200여 명은 되지 않았을까 싶어. 그때는 돈이 많아 돌아서 그랬는지 길거리는 사람들로 북적북적 했지. 이렇게 사람들이 많았을 때니까 5일 장도 열렸어.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인구가 줄기 시작하니까 5일장도 없어지더라고. 마지막으로 5일장이 섰던 때가 아마 21년 전이었던 같은데.....,.,“

    일도일각의 명인


    평범한 얼굴, 순박한 웃음, 유난히 반짝거리는 눈을 가진 사람. 그가 해남 유일의 옥공예 장인 김육남 씨다.
    김 씨는 2010년 10월, ‘제40회 대한민국 공예품대전’에 ‘서화용품’을 출품해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옥공예로 국무총리상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최초라고 했다. 김 씨는 “이 상으로 인해 자신의 30년 옥공예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냥 기쁘다”고 했다. 특히 더 기쁜 이유는 “내가 작업의 전 과정을 직접 했고,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김 씨는 “공예대전에 나오는 작품들 중에는 장인 몇이 협력 작업을 해 출품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낸 자신이 더 없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고 얘기한다.


    사실 김 씨는 이전부터 옥공예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농촌지역에 거주하다보니 사람들로부터 평가절하 되었을 뿐 안목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미 장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공예가들은 김 씨를 ‘일도일각’(一刀一刻)‘의 명인이라고 칭한다. 원석에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바로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김 씨는 자신이 ’국무총리상‘을 받은 것도 아마 일도일각의 기술 때문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김 씨의 추측은 일도일각의 기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방증하고 있다. 아마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은 수많은 형상들이 김 씨의 머리에는 이미 자리 잡고 있고 있는 것 같다. 투명한 레이어처럼.


    옥동마을


    해남읍에서 차로 20여 분을 달리면 해남 옥동마을이 나온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도로 왼쪽 조금 들어간 장소에 폐가처럼 서있는 ‘옥공예 전시판매장’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30여 미터를 더 가면 도로 왼쪽에 아담하고 깨끗하게 지어진 건물 한 채를 볼 수 있는데 이곳이 김육남 씨 부인이 운영하는 ‘화신공예’, 옥공예 판매장이다.


    이 건물 맞은편에는 70~80년에 우리가 살았던 낮은 집이 있는데 이곳 문을 열고 들어서면 동네 복덕방을 겸하고 있는 김육남 씨의 사무실이 나온다. 이곳에서 문을 한 번 더 열고 들어가면 김육남 씨의 보디가드를 겸, 애완견 00가 지키고 있는 작업장으로 갈수 있다.


    옥과의 인연


    김 씨는 강진 태생이다. 그런 그가 옥에 대해 알게 된 것은 9살 때였다. 마침 옆집에 해남 화산에서 강진으로 시집오신 할머니가 살고 계셨는데 그 할머니 김 씨에게 옥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때부터 김 씨는 일 년에 한 두 차례 옥동에 들려 옥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나갔다.


    김 씨가 태어나기도 전 김 씨의 누나는 장흥으로 시집을 갔다. 누나 집을 자주 찾았던 김 씨는 장흥에서 또래의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몇 명이 옥동에서 옥공예 일을 하고 있었다. 김 씨와 옥공예와의 인연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어. 아버지가 집을 비우신 사이 마을 이장님을 집을 찾아오셨는데 도장을 달라 시는 거야. 아버지가 출타를 하셨으니 어린 내가 도장을 어떻게 찾겠어. 그래서 재미삼아 도토리에 아버지 도장을 새겼어. 그렇게 해서 임시 도장으로 썼지. 아버지 도장을 손수 팠으니 어린나이에 얼마나 기뻤겠어. 그 때부터 적극적은 도장 파는 일을 한 거지.”


    김 씨의 선친은 젊은 시절 서당 선생님을 하셨고 나중에는 짚공예를 하셨다. 김 씨는 부친이 50세 되던 해에 태어났는데, 김 씨 집안의 여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해서 이름을 김육남이라 지었다고 한다. 김 씨는 이런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부터 공예를 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의 재주는 부친의 솜씨를 물려받았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도토리로 도장을 팠었는데 하다 보니 좀 시시하더라고. 누가 쎄돌이 좋다고 해서 쌔돌로 도장을 파다가, 11살 때부터는 옥돌로 조각을 하기 시작했어. 옥돌에 도장도 세기고 토기, 호랑이, 자동차 같은 모양들을 새기는데 잘되기도 하고 재밌더라고.”


    김 씨는 이렇게 다져진 실력을 가지고 옥공에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옥동을 찾았다. 그가 처음 취직한 곳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병석 씨 가계였다. 처음이라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6개월 정도를 일한 다음, 부곡리 한종준 씨 옥공예 기술자로 가게 된다. 이곳에 약 2년 정도 일을 했다. 그 후 김 씨는 75년까지 이 점포 저 점포를 옮겨 다니게 된다. 그러다 1976년, 남의 점포 종업원으로 일한지 7년 만에 자신의 점포를 갖게 된다. 김 씨는 자신의 점포를 차렸지만 간판은 달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점포에 간판을 단 것은 1988년, 점포를 차린 지 12년 만의 일이었고, 결혼을 한 후의 일이었다.


    옥공예 과정


    옥공예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제작하고자 하는 형태에 적합한 원석을 골라야 한다. 이때 가공하자고 하는 작품과 동일한 원석을 이용하게 되면 재료의 낭비를 줄일 수 있고 가공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납작한 원석은 거북이, 둥근 형태의 원석은 두꺼비, 사각이면 호랑이를 제작하는데 적합하다. 원석을 고르는 작업은 그만큼 중요하다.


    원석을 골랐으면 에어 컴프레서를 이용해 불필요한 부분을 쪼개 내거나 절단기를 이용해 절단 한다. 이렇게 해야 조각칼로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는 수고를 덜 수 있다.

    원석이 원하는 형태를 어느 정도 갖추게 되면 조각칼을 이용해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낸다. 정밀한 작업이라 여기서 실수하면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모양이 완성되면 각종 사포를 이용해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다.
    표면 작업이 끝나면 작품에 광택이 나게 하기 위해 초를 바르는 열처리 과정을 거친다.


    작품은 이렇게 해서 완성된다.
    김 씨는 “옥 공예품을 완성하려면 14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순서대로 열거하자면, 큰 절단(일차 절단) - 작은 절단(2차 절단) - 홈파기- 밀 칼로 각내기 - 건목 치기 - 그라인딩 - 핸드그라인딩 - 기계 페이퍼 - 밀 칼로 마무리 - 마른 사포 - 물 사포 - 열처리 - 광내기 등이다.
    요즘처럼 현대 장비가 없던 시절에는 흥부가 박탈 때 쓰는 톱을 쓰고 정을 이용해 쪼아냈다고 한다.


    원석에 대한 김육남 씨의 생각


    김 씨는 “옥공예에 필요한 국내산 원석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연옥을 캐기 위한 목적으로 광산을 개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김 씨의 경우는 광산에서 다른 광물을 캐다 우연히 발견된 연옥을 구입해서 쓰고 있다고 했다.
    사실 국내산 연옥이라 해서 특별히 좋을 것은 없단다. 금에 생산지를 표시하지 않듯 옥도 광물인데 지역 표시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내산을 고집하는 이유는 소비자들의 인식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것에는 한국의 얼이 담겨야


    김 씨는 “외국에서 수입해온 제품들을 보면 훌륭한 작품도 간혹 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의 문화가 달라 외국산 제품에 대해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것. 우리나라 항아리는 후덕한 옛날 맏며느리의 엉덩이처럼 펑퍼짐 한데 비해 외국에서 수입되는 것은 작고 가볍다고 했다. 김 씨는 이런 현상을 “한국인의 얼이 담기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주장한다.

    윤승현 news@jeo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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