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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춘영 가죽 공예가, 명인의 길로 성큼...

  • 작성일 2012-08-08 10:30:05 | 수정일 2016-11-08 17:11:42


  • “가죽공예는 어찌 보면 정말 정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성을 들인 만큼 좋은 작품을 선보일 수 있으니까요. 잠시라도 교만하거나 나태하면 바로 작업 중인 작품에 티가 납니다.”

    가죽공예 20년 외길 윤춘영 공예가의 말이다.

    대상을 타기까지
    윤춘영 씨는 얼마 전 ‘제10회 대한민국 아카데미 미술대전 공예부분’에서 ‘모란 화초장’이란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전통적인 화초장을 재해석해 한지와 가죽공예를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작품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윤 씨는  가죽공예와 관련해 이곳저곳 많은 행사장을 다녔다. 때로는 관람객으로 때로는 제품을 판매하는 공예가로. 윤 씨는 이 때 한지의 세계를 접했다. 그리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무궁무진한 한지의 활용성을 간파했다. 윤 씨가 한지와 가죽공예를 작품을 구상하게 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그러나 생각을 실행해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바쁜 스케줄 때문에 한가하게 작품을 구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작품 한번 만들어봐야지 하면서도 그 생각은 잠시 뿐이었다.

    윤 씨가 가죽공예 강의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대한민국 공예대전’ 공모가 시작됐다. 덩달아 윤 씨의 고민도 시작됐다.

    그때였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 같고, 흥부가에 나와 조금은 친숙한 물건. 그것은 바로 화초장이었다. 더 나아가 한지와 가죽공예가 결합된 화초장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윤 씨는 일단 목표가 정해지자 강의가 없는 시간을 쪼개 틈틈이 작업을 해 나갔다. 먼저 가죽에 모란꽃을 그린 다음 꽃잎의 경계를 따라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 나갔다. 그동안 바느질 장인으로부터 사사 받은 바느질 솜씨가 유용하게 쓰이는 순간이었다. 잎을 따라 바느질을 해주자 모란꽃에 입체감이 생겼다. 그리고 꽃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입한 반제품 화초장에 가죽공예 작품을 붙이자 완성 된 화초장의 형태를 갖췄다. 화초장을 완성한 윤 씨는 화초장에 금속제품으로 된 다리를 붙였다. 출품하기 전 금속제품 다리에 한지를 덮어씌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윤 씨는 화초장에 금속다리를 붙인 채로 출품해야 했다. 그것도 마감시간을 넘겨 간신히 접수했다. 접수가 완료된 시간이 오후 10시 30분이었다.

    힘들게 접수했지만 결과는 도예선 탈락이었다. 윤 씨가 처음 맛 본 쓴 잔이었다. 윤 씨는 시간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을 위로해 보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며칠 후 작품을 되돌려 받았다. 윤 씨는 꼼꼼히 작품을 확인했다. 그 결과 작품이 부실덩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쁘다는 핑계로 최소한의 확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윤 씨는 이때 자신이 자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 씨는 이때부터 꼼꼼하게 작품 수정에 돌입했다. 지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금속재 다리도 없앴다. 미흡한 부분은 좀 더 보완했다. 그런 다음 수정한 화초장을 ‘대한민국 아카데미 미술대전’에 출품했다. 결과는 대상이었다. 마침내 대상을 획득한 것이다.

    '대한민국 공예대전' 입상에 이어  ‘대한민국 아카데미 미술대전’ 대상까지 수상한 윤 씨가 가죽공예 명인의 반열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강의를 위해 전국을 다니다

    윤 씨의 또 다른 직업은 강사다. 각종 기관과 학교 등을 다니며 가죽공예를 가르치고 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인근지역은 물론이고 화순, 고흥까지 출근해 강의를 하고 있다. 그녀의 강의를 듣는 수강생의 연령층도 다양하다. 초등학교 학생에서부터 70세를 노인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15년 동안 가르친 사람들을 일렬로 세우면 강진에서 서울까지 이어질 것이고 강의한 기관을 세우면 강진에서 광주까지는 갈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한번은 서울 모 기관에서 윤 씨에게 강의를 부탁했다. 대구공예박람회에서 윤 씨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실력을 인정해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윤 씨의 판단에 그 과정은 준전문가 과정이었다. 윤 씨는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그 강의를 위해 몇 달간 서울로 출근했다. 윤 씨는 지금도 그 제자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윤 씨, 꿈을 말하다
    윤 씨는 뚜벅이다. 운전면허가 없다. 가까운 곳은 지인에게 부탁해 이동하지만 먼 곳에 가려면 양손에 가죽공예 실습 도구를 잔뜩 들고 버스를 타야 한다. 그래서 올해는 꼭 면허를 따고 싶다고 말했다.

    윤 씨가 가장 이루고 싶은 것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작업을 할 수 있는 넒은 공간을 갖는 것이다. 지금은 집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공간이 좁아 멀리서 찾아온 제자들을 맞이하기에는 좀 민망하단다. 그래서 넓은 작업공간을 갖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윤 씨는 가죽공예 관련 책을 저술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중에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실용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이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든 작품을 설명해 주고 설명을 따라하면 동일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그런 책을 쓰고 싶단다.

    윤 씨는 공예 인생 30년을 넘긴 장인들이 즐비한 이 세계에서 아직은 명인보다는 중견 공예가로 불리는 것이 맞다. 그러나 허울 좋은 껍데기를 벗기고 작품의 세계로 얘기한다면 그녀는 분명 가죽공예의 명인이다.

    관리자 news@jeo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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