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식 회고록 『성공과 좌절』 출간

  •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식 회고록 『성공과 좌절』 출간


    □ 제목 : 성공과 좌절
       부제 : 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

    지은이 노무현
    펴낸이 우찬규
    펴낸날 2009년 9월 22일
    펴낸곳 도서출판 학고재
    담당 편집부 강상훈 팀장(02_745_1722~3, 011_9095_6138)
    쪽수 284쪽
    값 15,000원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지난 이야기를 쓰는 일뿐이다.”

    “회고록은 한참 후에 쓰려고 했다. 아직 인생을 정리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봉하마을 가꾸기, 시민광장, 정책 연구……. 그래서 ‘우공이산’을 표구하여 붙여놓고 이런저런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장애가 생겼다.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 마침내 피의자가 되었다. 이제는 일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지난 이야기를 쓰는 일뿐인 것 같다. 왜 써야 할까?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다. 일은 삶 그 자체이다.”(‘성공과 좌절’, 16쪽, 최종 수정일: 2009년 5월 20일 오후 5시 5분)


    □ 차례

    마지막으로 남긴 글_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제1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1장 미완의 회고
       성공과 좌절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스스로 입지를 해체하는 참담함으로

    2장 봉하 단상
       <봉하 글마당>에서
       <좋은 자료 모으기 동호회>에서
       <진보주의 연구모임>에서

    제2부 나의 정치역정과 참여정부 5년-노무현 대통령 육성기록

    1장 시대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1946년생, 그리고 가난
        큰형님, 어린 시절의 표상
        글짓기 반항 사건
        4.19와 5.16의 기억
        개척시대, 개발시대
        사법시험 이야기
        결혼, 장인 그리고 연좌제
        판사 생활, 변호사 생활
        부림사건, 인권변호사
        정치로 들어가는 길
        3당 합당 충격
        김대중과 김영삼
        선거, 왜 부산인가
        바보 노무현과 노사모
        대선출마 동기
        굿바이 청와대
        고향으로 간다는 것

    2장 참여정부 5년을 말하다
        참여정부 평가
        성장과 복지
        남북정상회담
        북핵문제, 남북관계, 동북아 평화
        한미관계
        한.미 FTA
        언론개혁
        정치개혁 그리고 좌절

    3장 한국 정치에 대한 단상
       한국 정치에 대한 고언
       시민주권시대

    노무현 대통령 연보

    □『성공과 좌절-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은
       어떤 책인가

    서거 며칠 전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회고록 집필에 들인 대통령의 노력은 집착 너머의 것이었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는 마지막 남긴 말에서 보듯, 회고록 작성은 막다른 데 이른 대통령의 삶, 그것이었다.

    회고록은 제1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와 제2부 ‘나의 정치역정과 참여정부 5년(노무현 대통령 육성기록)’ 등 총 2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1장 ‘미완의 회고’와 2장 ‘봉하 단상’으로 구성돼 있다. 
    1장 ‘미완의 회고’는 이 책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대목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회고록의 목차를 포함, 대강의 구성을 직접 작성한 ‘성공과 좌절’(자세한 내용은 다음 페이지 참조)이다. 그리고 회고록 집필을 결정한 뒤 줄거리를 밝힌 구술 기록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와 ‘스스로 입지를 해체하는 참담함으로’ 등을 수록했다.
    2장 ‘봉하 단상’에서는 노 대통령이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의 비공개 카페에 올린 글들을 최초로 공개한다. 네티즌과 함께 토론하고(‘민주주의와 시민의 주권행사’) 이명박 정부의 공과를 논하는 내용(‘춤추는 미사일, 누구를 위한 것일까?’/‘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을 담고 있다. 퇴임 후에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뇌하며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한 노 대통령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2부는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을 앞둔 2007년 9월부터 2008년 1월까지 청와대에서 네 차례 가진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육성기록으로 모두 3장으로 구성했다.
    1장 ‘시대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는 어린 시절부터 인권변호사, 투사, 제도권 정치인으로 이어진 인생 역정을 술회한 내용이다. 초등학교 시절 ‘글짓기 반항 사건’에서 김대중·김영삼 대통령과의 인연과 평가까지, 흥미로운 일화들을 특유의 유머를 섞어 담담히 회고한다.
    2장 ‘참여정부 5년을 말하다’는 대북관계, 이라크 파병, 한미 FTA 등 보수․진보 양쪽의 협공을 받았던 노 대통령의 외교 전략에 대한 회고를 담았다. 또 정치개혁, 언론개혁, 공무원 사회 개혁 등 참여정부 시절 벌였던 여러 개혁이 어떤 성과를 남겼고 어떤 점에서 실패했는지를 돌아본다. 특히 대통령이 처음으로 공개하는 남북정상회담의 긴박했던 분위기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인물평 등 막후의 이야기를 비롯해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등 정치적 동지들에 대한 언급 등이 흥미롭다.
    3장 한국 정치에 대한 단상은 노 대통령의 정치관과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 드러나 있다. 국민의 눈높이를 넘어, 역사의 눈높이를 맞추며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지 않는 정치 지도자상을 역설하고(‘한국 정치에 대한 고언’) 시장 주도 경제로 들어선 한국이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의 미래(‘시민주권시대’)에 대해 논한다.


    □ 못다 쓴 회고록 ‘성공과 좌절’은 어떤 내용인가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제1부 1장에 들어있는 ‘성공과 좌절’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회고록의 목차를 포함, 대강의 구성을 직접 작성한 글이다. 200자 원고지 90매 분량의 이 글은 9개의 장 제목과 47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된 목차와 항목별 질문 및 추가 문제 제기를 담고 있다.
     
    1장은 서언 격의 글이다. 회고록의 전체 기조를 ‘실패의 이야기’로 잡게 된 심경을 밝혔다. ‘정치를 하면서 이루고자 했던 나의 목표는 분명히 좌절’되었고 ‘시민으로 성공하여 만회하고’ 싶었으나 ‘이제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16쪽)는 것이다. 한편 대통령은 ‘나의 실패를 진보의 좌절, 민주주의의 좌절’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 우려를 표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할 일이 있고, 역사는 자기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17쪽)
    2장에서 노 대통령은 국가의 역할, 대통령의 과업과 역사적 과제 등을 다루고 있다. 참여정부의 비전과 전략 가운데 대통령이 ‘국민통합의 전략’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었는지를 강조한다.
    3장에서는 참여정부의 노선을 ‘제3의 길’ 논의와 관련짓는 사유를 펼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슈퍼 자본주의』의 저자 로버트 라이시의 노동전략, 토니 블레어의 『영국 개혁 이렇게 한다』, 기든스의 책 등과 미국 민주당 싱크탱크인 진보정책 연구소의 보고서를 언급하며 1990년대 세계적 흐름을 짚는다. 특히 기존 좌파와 선을 긋는 중도 진보주의의 길에 대한 대통령의 모색은 ‘한국형 제3의 길 논쟁’을 촉발하는 논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24쪽).
    4장에서 대통령은 참여정부가 ‘절반의 성공’도 못 이뤘다고 자평한 뒤 그 원인을 찾고 있다. ‘개인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준비된 조직적 세력도 없이 정권을 잡았고 우리 사회가 미처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개혁을 하려고 한’(29쪽) ‘무리한 욕심’이 실패와 오류의 원인이라고 솔직히 토로한다.
    5장에서는 ‘노무현 정치’가 좌절하게 된 배경에 대해 논한다. 연정, 지역구도 극복 등 자신의 정치적 실험이 ‘정치적 성공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바꾸려’ 했던 시도였기에 실패했으며 ‘정권은 정당에 있고, 권력은 시민사회에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6장은 ‘대통령 취임 전부터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답을 찾지 못한 이야기’를 다룬다.
    '인간의 도적적 역량은 스스로의 파멸을 막을 만큼 현명한 것일까?’ ‘일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새로운 세계 체제는 가능할 것인가?’(36쪽) 등 대통령이 제기한 질문과 각각의 항목에 추가한 구체적인 사례들(‘핀란드의 신성장동력’ ‘축소재생산 경제’)은 그 천착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생생한 흔적이다.
    7장 ‘정치하지 마라’는 대통령의 고뇌 어린 자기 응시가 두드러진다. 정치인은 ‘싸움이 직업’이고 ‘빚이 많은 사람’이며 ‘노후 대책’뿐만 아니라 ‘생활비 확보 방법’조차 구하기 어려워 ‘유혹에 빠지기 쉬운 직업’이라는 것이다(38쪽). 그럼에도 정치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여전히 ‘도덕성’이라고 지적하면서 대통령은 ‘공과 사를 구분하는 판단력, 주변을 관리할 능력이 필요하다’(39쪽)고 말한다.
    8장 시민주권 이야기는 대통령이 그렸던 민주주의의 미래인 ‘시민주권론’에 대한 스케치다. 노 대통령은 2007년 인터뷰에서 시민의 힘으로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을 통제하는 시민민주주의야말로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미래임을 밝힌 바 있다(273쪽).
    9장은 ‘먹고 사는 일이 급해 덮을’(41쪽) 수밖에 없었던 인간과 역사에 대한 공부 계획을 담았다. 『코스모스』『거의 모든 것의 역사』『왜 다윈이 중요한가』『유전자 전쟁』등의 과학·인문서 등을 읽고 인생이란 무엇이고, 인생에서 성공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성공한 인생인지를 묻는 식으로 회고록을 구성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 『성공과 좌절-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의
        중요 내용 발췌

    제1부_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성공과 영광의 기억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의 기억들이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라는 덕담들, 그리고 혼란스러운 생각들, 무엇이 성공한 대통령일까? 인기가 높은 대통령? 역사에 이름을 남긴 대통령? 직무를 잘 수행한 대통령?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이룬 대통령?”(제1부 1장 미완의 회고, ‘성공과 좌절’, 16쪽)

    “대통령 임기 내내 나는 경제 파탄, 민생 파탄, 총체적 파탄, 잃어버린 10년, 이런 평가를 하는 사람들과 싸웠다. 말년이 되면서 나는 정치적 좌절을 이야기했다.(-정치를 하면서 이루고자 했던 나의 목표는 분명히 좌절이었다.) 시민으로 성공하여 만회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제 나는 인생에서 세속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는 무엇, 분별을 넘어서는 깨달음이라도 구하고 싶다. 그보다 마음을 닦아서 이 마음의 고통을 극복해나가야 할 처지이다. 그러나 그동안 배운 것이 없다.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 것 같다.”(제1부 1장 미완의 회고, ‘성공과 좌절’ 16~17쪽)

    “이제 내 이름으로 내는 것은 전혀 다른 책이어야 한다. 인생사의 실패 이야기나 지난 이야기이다. 진짜 회고록이다. 옛날에 나는 회고록을 안 쓰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회고록을 써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것도 영광과 성공의 얘기가 아니고 좌절과 실패의 얘기를, 시행착오와 좌절과 실패의 얘기를 써야 맞는 게 아닌가 싶다.”(제1부 1장 미완의 회고, ‘스스로 입지를 해체하는 참담함으로’, 52쪽)

    “산다는 것이 뭘까? 안방에서 걷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뒤로 돌아 다시 하나, 둘……. <빠삐용>이라는 영화에서 본 장면이 생각난다. 기자들 때문에 마당에도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엊그제 뒤뜰에 나갔던 모습이 조선일보 카메라에 잡혔다고 한다. 일 킬로미터가 넘는 산꼭대기에서 망원카메라로 잡은 사진이란다…….(제1부 2장 봉하단상, ‘언론은 흉기다’, 78쪽)

    “저의 집은 감옥입니다. 집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저의 집에는 아무도 올 수가 없습니다. 카메라와 기자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도, 친척들도, 친구들도 아무도 올 수가 없습니다. 신문에 방송에 대문짝만하게 나올 사진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상한 해설도 함께 붙겠지요.”(1부 2장 봉하단상, ‘제 집 안뜰을 돌려주세요’, 79쪽)


    제2부_나의 정치역정과 참여정부 5년

    “그런데 안 내었으면 그만인데 저는 반항하는 의미로 제목을 ‘이승만 택통령’으로 쓰고는 내용을 백지로 냈습니다. 여선생님이 오셨는데 제 행동이 기가 막혔는지 울고 가셨습니다.  나중에 교무주임 선생님인가 지도부 주임 선생님이 오셔서 교무실로 잡혀갔습니다. 그래서 교무실에 가니 “왜 그랬냐?”고 자꾸 묻는데 제가 뚱딴지처럼 불쑥, “우리 형님하고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자라 합니다”라고 답을 해버렸습니다. 선생님이 기가 막혀서 억장이 무너지는지 저보고 꿇어앉아 있으라고 하셨습니다.”(제2부 1장, 시대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글짓기 반항 사건’, 117쪽)
                                                   
    “정치를 해오면서 줄곧 정수장학재단은 주인에게 되돌려주거나 아니면 사회로 환원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비영리 공익재단이긴 하지만 누가 운영하는가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장학재단이 ‘장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돌려주어야 우리 사회의 정의가 실현되고 역사가 바로잡힌다고 생각하면서 정치를 해왔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목표로 생각해왔습니다. …… ‘과거사 정리라는 것을 어디까지 해야 하나?’ 하면서도 논리적으로 그 한계를 긋기가 어렵고 또 역사의 새로운 기준을 세워나가는 데 필요한 만큼 ‘판단이라도 하고 넘어가자, 하다못해 이름표라도 갈아붙이자!’ 하는 그런 것이 역사 정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저렇게 장물이 그냥 남아 있고 그 주인이 정권을 잡겠다고 하는 상황까지 용납하고 받아들이려니 무척 힘이 듭니다.”(제2부 1장, 시대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4․19와 5․16의 기억’, 117쪽)

    “저는 사실 결혼하기 전만 해도 장인에 대한 이야기를 잘 몰랐습니다. 예전에 면사무소 서기를 했다는 것과 친구 분들이 많았다는 것, 해방 이후에 좌익 운동에 가담했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좌익 운동을 조금 하시다가 돌아가신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선거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자세하게 가르쳐주어서 6·25 당시 인민군이 내려올 때 면책임자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 연좌제에 걸리면 시험에 붙어도 취직을 못하게 되는데 당시의 저에게 상당한 저항감을 갖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취직을 못한다는 이야기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특히 그것 때문에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결혼을 못한다는 것은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저항감을 가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고시만 보고 판사는 안 하면 될 것 아닌가?’ 하고 딱 잘라 결정을 했습니다.(제2부 1장, 시대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결혼, 장인 그리고 연좌제’, 134쪽)

    제가 처음부터 조세전문 변호사가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싸움을 하러 다니기 위해 시간을 내려고 사건을 줄이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건을 맡기다보니 조세 사건만 남은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조세 사건은 대구고등법원에서 하는 것이어서 일주일에 하루만 법정에 나가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시국 사건과 조세 사건, 크게 두 가지만 했습니다. 노동 사건은 서비스였고, 조세 사건은 어쨌든 저도 먹고 살기 위해서 했습니다. 노동법률상담소를 만들어놓았는데 또 환경문제와 관련해서 도움을 요청해와 거기에 공간을 주었더니 사무실의 거의 절반이 운동단체에게 나가버려 나머지 절반으로 변호사 업무를 했습니다. 그러다 점차 운동이 본업이 되었습니다.(제2부 1장, 시대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부림사건, 인권변호사’, 139쪽)

    그렇게 청문회를 하면서도 계속 노동 현장에 다녔습니다. 제가 주로 하는 일은 노동운동 지원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국회의원이 중립을 지켜야지, 왜 노동자 편만 드는가? 사장 편도 좀 들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공격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 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국회에 299명의 의원이 있는데 200명 이상이 사장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까?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장 편에 서 있는데 노동자 편도 몇 명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정치인이라면 그런 문제를 조정하고 통합시켜 나가야지, 왜 자꾸 싸움을 붙이고 갈등을 일으키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받았습니다. 그런 질문에는 “조정하고 통합하는 것은 중진들이 하는 일이고 저는 초선의원 아닙니까?” 하고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제2부 1장, 시대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부림사건, ‘정치로 들어가는 길’, 139쪽)

    김대중 대통령은 해외에서와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국보급 대접을 받을 만한 지도자입니다. 경력만 봐도 그렇습니다. 물론 지역분열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얼마 전에 세종대왕의 리더십에 대한 책을 보니, 저자가 ‘세종대왕은 책을 많이 보았는데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고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 계실 때에는 지금의 방 하나가 완전히 서고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이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온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제2부 1장, 시대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김대중과 김영삼’, 150쪽)

    언론은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내 우리 경제가 위기라고 외쳤습니다. ‘경제는 심리’라고들 합니다. 경제가 망한다고 하는데 누가 소비하고 누가 투자하겠습니까? 언론들이 책임 있게 보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혀 무책임하게 보도를 합니다. 언론의 입장에서 대통령과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경제에 대해 계속 부정적으로 저주나 악담 수준의 기사를 쓰는 것입니다. 결국 저를 깎아내리기 위한 것인데 그래서는 경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대통령 깎아내리려고 경제까지 깎아내려서야 되겠느냐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2004년부터 2006년 사이에 외국인 투자자들은 우리 주식에 투자를 많이 한 반면 국내 투자자들은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5월이 되면 이런 보도가 나옵니다. ‘외국 투자자들이 배당을 받아서 이익을 송금하는데 얼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에서 외국인들이 이만큼 벌어갔다고 하면서 국민들 배를 아프게 만드는데 솔직히 한국 신문 보는 사람들이 누가 투자하고 싶겠습니까? 결국 일이 그렇게 되는 사이에 외국인들은 한국 시장을 정리하고 남길 만큼 남겨서 떠나가는 것입니다.(제2부 2장, ‘성장과 복지’, 186쪽)

    거듭 말씀 드리지만 부동산 정책의 본질은 거래실명제, 보유세를 통한 부동산 세원의 투명화입니다. 실제 거래내역을 등기부에 그대로 등재하고, 보유하고 거래하는 만큼 정당한 세금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장기적으로 부동산 투기는 설 땅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땅 많이 가진 사람, 돈 많은 사람 등 우리 사회의 힘 있는 사람들이 반대해왔기 때문에 정책으로 만드는 데 번번이 실패한 것입니다. 다만 국민의 정부에서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IMF로 인해 부동산 경기가 내리막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여정부는 보유세제를 ‘적당히’가 아니고 아주 확실히 했습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에서 비판이 많은 것입니다. 보유세제를 제대로 한다는 것은 과표가 계속 올라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과표가 올라가는 것을 참여정부 들어서 부동산 가격이 올라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제2부 2장, ‘성장과 복지’, 191쪽)

    저는 교양이 없습니다. 저도 대통령이 될 줄 알았으면 미리 연습을 하는 것인데, 체질적으로 제가 허리를 잘 굽히는 편이고 윗자리에 앉으면 불안해하고, 말은 위엄 있게, 행동은 기품 있게 할 필요가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 준비 안 된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다른 점에 있어서는 승복하지 않지만 언어와 태도에서 이야기한다면 충분히 훈련받지 못했던 점은 있습니다. 우리 아내가 어디 행사장에 들어갈 때 고개 숙이지 말고 똑바로 걸으라고 하는데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집니다.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제2부 2장, 참여정부 5년을 말하다, ‘참여정부 평가’, 179~180쪽)

    김정일 위원장은 우리가 듣던 대로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만나보니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놀란 것은 국정 전반을 아주 소상하게 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개혁이니 개방이니 이런 것에 대해 말하면 자신의 소신과 논리를 아주 분명히 체계적으로 표현하더군요. …… 실무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융통성이 있고, 유연하게 결정들을 해나갈 수 있는 그런 점에서 대화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북쪽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유연하게 느껴진 사람은 김정일 위원장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단히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제2부 2장, 참여정부 5년을 말하다, ‘남북정상회담’, 204~205쪽)

    체류연장 제안 자체는 깊이 생각했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조금 당황스러웠지요. 회담을 더하자는 말인지, 아니면 회담 이외의 일정을 조금 더 하라는 이야기인지, 이 부분이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얼핏 물어본 것 같았는데, 그냥 넘어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저로서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정일 위원장이 “그거 결정 못합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또 평소 버릇대로 “큰 건 내가 결정해도, 작은 건 내가 결정 못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답을 두고 상당히 전략적인 대답이라고 해석을 많이 하는데 실제로는 노련한 전략적 대답이 아니고, 평소 습관을 그대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 정직하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는데, 뒤에 보니까 그 대답이 제법 괜찮은 대답이더군요.(제2부 2장, 참여정부 5년을 말하다, ‘남북정상회담’, 205쪽)

    북폭설 때문에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한국에 거래나 투자를 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북폭이라니,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일부 언론이나 전문가들이 ‘왜 대통령이 나서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 미국이 마음이 상할까 우려되는데 경솔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을 합니다.
     많은 국민들과 외국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는데 실제로 북폭이 현실성이 없다는 점을 이해시키려면 누구의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누가 이야기를 해주어야겠습니까? 대통령의 말이 가장 신빙성 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북폭 같은 것은 없도록 할 터이니 안심하고 갑시다’라고 말했습니다.(제2부 2장, 참여정부 5년을 말하다, ‘북핵문제, 남북관계, 동북아 평화’, 215~216쪽)

    이라크 파병 문제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생각해봐도 역사의 기록에는 잘못된 선택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대통령이 역사의 오류를 기록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즉 스스로 역사의 오류로 남을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부득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참으로 어렵고 무겁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보내는 것이긴 했지만 당시 파병 외교는 아주 효율적인 외교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우리나라 보수진영에서는 적어도 1만 명 이상을 전투병으로 보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생각이 두 쪽으로 갈려서 1만 명, 적어도 7천 명, 그렇게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참모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안보팀 쪽이겠지요.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결국 전투병 3천 명을 비전투 임무로 보내게 된 것입니다.(제2부 2장, 참여정부 5년을 말하다, ‘한미관계’, 223쪽)

    탄핵 때는 그야말로 담담하게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매우 고통스럽고 불행한 시기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매일 탄핵을 규탄하고 저를 지지하는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  열린우리당은 창당하지 않을 수 없는 정당이었습니다. 지역정당을 벗어나서 전국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적 당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민주당에서 전국정당을 만드는 노력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후보일 때 외부의 다른 후보와 내통하면서 해당 행위를 했던 사람들이 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에도 당의 개혁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당의 개혁을 반대하니 결국 열린우리당이 창당된 것입니다.(제2부 2장, 참여정부 5년을 말하다, ‘정치개혁 그리고 좌절’, 241~242쪽)

    이상한 것도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진보사상 모두 지난 20년 동안 눈부신 진보를 이루었는데, 막상 민주주의 세력, 진보진영 사람들은 그 동안 흩어지고 깨지고 점차 힘이 빠지는 20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적 환경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우리 자신의 판단 오류, 잘못된 선택과 같은 것들이 쌓여서 그런 결과가 온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세력이 지금처럼 와해된 느낌을 받는 것이, 하필 저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다보니 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상황은 5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당시도 우리 쪽은 거의 괴멸 상태였습니다. 10년 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괴멸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1997년 8월경까지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은 거의 제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민주진영과 진보진영 모두가 우왕좌왕하고 괴멸 상태에 있었습니다. 2002년에 와서도 굉장히 흔들렸습니다. 2001년까지는 그래도 우리 사이에서는 기운이 살아 있었는데 2002년 지방자치선거를 하던 당시에는 김대중 정부도 바닥이었고 저도 바닥이었습니다.(제2부 2장, 참여정부 5년을 말하다, ‘정치개혁 그리고 좌절’, 252~253쪽)

    돈을 많이 벌었어도 그것만 가지고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우리 국민들의 도덕적 자각과 성숙도가 어느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권력 내부의 원칙 없는 투쟁, 시장과 정치권력 사이의 타협 없는 투쟁, 이런 모순만 계속 반복될 뿐이지 그 위에 국민의 인간다운 삶과 가치, 우리 국민의 주권자로서의 지위, 이런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회주의와 불신의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본질적 과제인 것입니다.(제2부 3장, 한국 정치에 대한 단상, ‘시민주권시대’,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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