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골 주민들과 제15대 심수관









  • 친환경 적토미와 백자가마터
    장흥읍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15분 정도를 달리면 용산면이 나온다. 용산면사무소에서 관산 방향으로 1km를 더 간 다음 양어장이 있는 삼거리에서 오른 쪽 길로 접어들어 2.5km를 더 가면 월송리라는 작은 마을을 만날 수 있다.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곳의 여름 풍경은 다른 농촌 마을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인다. 동네와 다소 떨어져 있는 마을입구의 첫 집이 월송리 이장 문병갑씨 집이다. 문 이장 집에서 우측 농로 길을 따라 800m 정도 더 가면 조선 후기 백자 가마터가 나온다.

    백자골은 친환경농사를 짓는 마을로 유명하다. 한 마리에1680만원이 넘는 친환경 한우를 사육하는 한창본씨도 이곳에 살고  이장 문병갑씨는 고대미라 불리는 붉은 색의 적토미, 녹색의 녹미, 까만색의 흑미를 재배하고 있다. 이들이 재배하는 벼는 모두 친환경농법으로 재배되고 있다. 여름에는 다른 벼와 특별하게 구분되지 않으나 초가을이 오면 각각의 벼들이 제색을 띄기 때문에 마을은 형형색색의 농작물 경연장이 된다. 논에서 이 같은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된 것은 몇 년 전부터 시작한 친환경농사를 선도한 농가들 덕이다.

    친환경 적토미의 원조로 알려진 이 마을은 또 다른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데 조선 후기 백자가마터가 존재하고 있어 ‘백자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장흥에는 수 십 기의 가마터가 존재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역민의 무관심과 관할관청의 관리 소홀로 대부분 유실되고 현재는 수기의 가마터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백자골 가마터도 지역민들의 관심이 없었다면 그런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라고. 그 단적인 예로 용산면 풍길리에 있었던 고려시대 청자 가마터는 백자골 가마터보다 더 역사적 가치가 높지만 지금은 흔적도 찾기 힘들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백자 가마터 보존에 대한 백자골 주민들의 의지는 단호했다. 군에서 가마터 주변에 배수로를 내려던 계획도 가마터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저지했다고 한다. 지금의 백자골 가마터가 현 상태로 보존돼 있는 것도 주민들의 이런 노력 덕분이라고 한다 .

    우리가 찾은 백자 가마터 입구는 파릇파릇한 잔디가 심어져 있었다.
    문 이장은 “잔디를 들추면 이전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도록 블록 별로 표시가 되어 있다”고 했다. 가마터는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에 위치해 있었고 촘촘한 파란색 철망으로 둘러쌓여 보호(?) 받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가마터를 가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냥 방치했다면 방문객들이 더 훼손할 것이며 파편들을 수습해 갈 것이기 때문에 한편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예전 문 이장은 내게 이런 말을 들려준 적이 있다.
    “우리 어렸을 적에는 이 가마터가 지금처럼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소싯적에는 가마터 위에서 구르며 뛰어 논 적도 있었고 비가 오면 가마터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에게 문화재는 보호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소싯적 문화재를 보호하지 못하고 훼손하는데 한몫 했다는 미안한 때문일까?
    문 이장의 가마터 사랑은 애틋해 보인다. 어느 학자 못지않게 백자 가마터에 대한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는 문 이장이다.
    문 이장은 가마터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 모두를 들려주면서 “문화재는 어떤 명분으로 훼손하면 안됩니다. 잘 보존해서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백자골과 심수관가
    백자골은 가마터로 인해 백제 도공의 후손인 심수관가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심수관가는 백제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심당길의 후손으로 12대 심수관이 싸스마도자기로 전세계적으로 이름 얻자 심수관가는 그를 기리기 위해 ‘수관’이란 세습명을 사용하게 하고 있다.
    제12대 심수관은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을 7번 방문했으며 제 14대 심수관 때는 일본 NHK방송이 백자골을 찾아 심수관 일대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일본 NHK가 백자골을 방문한 이유는 가고시마의 가마터와 백자골 가마터가 400년의 시공간을 초월해 거의 동일하며 백자골 가마가 국내 최대의 가마라는 점이 작용했다고 한다. 백자골 가마는 6단 가마로 일명 망생이가마 혹은 너구리가마라고 불린다.
    현재 심수관가는 제15대 심수관이 이끌고 있으며 백자골과 이들의 관계는 민간외교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인연은 언제부터 일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백자골에도  우연찮은 인연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유학생 신분이었던 박성진씨가 일본 유학중 일본의 친환경단체인 “예농”에 가입해 활동을 하게 된다. 귀국한 박성진씨는 ‘전농회’에서 친환경 인증 담당자로 근무하게 되는데 백자골에서 친환경 농사를 짓는 한창본씨를 찾아 백자골을 방문하게 되고 백자골로 귀농하게 된다. 
    박성진씨가 귀농 한 직후 인 2005년 4월, 농업인, 공무원, 문화재위원, 도예공, 학자등 12명으로 구성된 ‘월송리조선백자복원추진위원회(이하 복원위)’가 결성된다. 이 때 ‘복원위’가 내건 기치는 ‘지역문화를 살리고 복원과 연계해서 친환경농산물 판매와 연결’이었다.
    이때부터 ‘복원위’의 소리없는 활동이 시작되는데 위원들이 자료를 조사하던 중 제15대 심수관이 일본 “예농” 회원인 것을 알게 되고 심수관이 2005년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제15대 심수관이 아사카와 다쿠미(1891.1-1931.4 / 조선의 소반,조 선도자명고)의 묘소를 방문하기 위해 망우리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 ‘복원위’ 위원들(위금량, 하재만, 박순진, 한창본, 문병갑, 박성진)은 만사를 제쳐놓고 망우리로 달려갔다. 복원위 위원들은 그곳에서 제15대 심수관과 나선아 문화재위원을 만나게 된다. 이 때 위원들은 백자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나선아 문화재위원에게 건넸으며 자료를 살펴본 나 위원은 “백자는 서민문화기 때문에 현재 천시 받고 있은 상황이나 백자골의 가마터는 역사적으로 보존가치가 높다”고 했다. 나 위원의 설명에 한층 고무된 ‘복원위’ 위원들은 이 자리에게 심수관에게 “백자골에서 초청하면 방문해 줄 수 있느냐”고 방문의사를 타진했고 심수관으로부터 “초청하면 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후로도 위원회는 심수관과 수시로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이때 일본어 통역과 메일은 박성진씨가 담당했다. 그러던 중 심수관으로부터 “백자골을 직접 방문해 확인해 보고 싶다”는 뜻을 전달 받게 된다.

    마침내 2006년 4월 백자보존위원회는 제15대 심수관을 장흥으로 초대한다. 이 때 400여만의 비용이 들었는데 군에서 일부 지원해 주고 나머지는 생태체험마을 비용으로 충당했다.

    백자골을 방문하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지역 주민 모두가 나섰다. 그리고 백자골에서 난 산채로 맛있는 점심을 준비했다. 그 정성을 알았을까 점심을 먹고 난 심수관은 “이런 음식을 일본에서는 먹어 보지 못했다”고 음식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점심을 마친 심수관은 백자 가마터를 둘러보았다. 이 때 심수관은 “선조의 고향을 찾아 마음이 따뜻하고 편안하다”며 “잘 보존하면 문화적 가치가 높을 것이다”라는 말로 백자위원들을 격려했다. ‘복원위‘ 위원들은 이 자리에서 심수관에게 “백자골 가마터에 대해 관심을 가져달라” 부탁을 하기도 했다. “왜 심수관에게 백자골 가마터에 대해 관심을 부탁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문병갑 이장은 ”주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심수관이 관심을 가지면 관이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지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 그런 부탁을 했다고.
    이런 ‘복원위’ 위원들의  따뜻한 마음을 이해한 것일까? 2007년 심수관은 7명의 ‘복원위’ 위원들을 일본으로 초대했다. 물론 초청비용은 심수관이 전액 부담했다.

    심수관의 고향인 가고시마 미산현을 찾은 ‘복원위’ 위원들은 현지 도예가들의 간담회에 초대되어 일본 도예가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또 일본 유기농법에 대해 견학 도 할 수 있었다. 유기농은 백자골이 고집스럽게  추진하고 있는 농법이다.

    ‘복원위’ 위원들은 미산현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장흥군과의 자매결연을 타진해 미산현 관계자들로부터 긍정적인 대답을 받아 내기도 했다.

    문 이장은 일본을 방문하고 난 후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설명했다.
    “일본에는 한국 역사에 남아있지 않는 생존 삼별초 군에 대한 자료도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일본 역사라고 한다.  필요에 의해 한국학자들이 이곳에서 자료를 얻어가지만 나중에 발표된 것을 보면 한국학자들이 모두 자기가 연구한 것처럼  발표해 이 곳 주민들은 한국 학자들을 싫어한다는 말도 들었다.”

    문 이장은 “일본이 문화에 대해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에 대해도 알았다 ”며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몇 가지 점을 지적해 주었다.
    “일본에서는 고속도로 공사 중 가마터가 발견되면 원형 보존하기 위해 ‘형틀만들기’ 작업을 통해 이전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비용은 많이 들지만 문화재를 전혀 훼손하지 않고 이전할 수 있다고 한다. 문화재는 복원도 좋지만 원형 그대로 후손에게 남겨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원형은 그대도 보존하고 복원된 모형은 원형 옆에 세워뒀더라. 그 예로 일본에서는 사금파리(파편) 하나도 소중하게 여겨 한곳에 모두 모아놓은 것을 보았다. ”

    2009년 4월 심수관은 일본 관광객들과 백자골을 찾았다.
    이 때 장흥군에서 부 군수, 군의장이 심수관을 만나 ‘장흥물축제‘ 때 초청의사를 타진했다. 심수관은 흔쾌히 승낙했다.

    2009년 7월 29일 제15대 심수관은 장흥 땅을 네 번 밟았다.
    다음 날 오전 백자골을 방문 동네 주민들과 대화도 나누고 백자가마터의 보존 상태를 확인하러 들렀다. 문학에도 관심이 많은 심수관은 이청준 생가에 들러 고인이 된 작가를 추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30일 오후 2시, 장흥군민회관 2층에서 제15대 심수관 초청 간담회가 열렸다. 감담회에는 백자골 주민과 백자에 관심있는 군민 50여명이 참석했으나 나중에는 30여명 정도 남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심수관을 초대한 장흥군에서는 부군수가 잠깐 얼굴을 내밀었을 뿐 바쁘다는 이유로 참석한 공무원은 없었다고 한다.
    문 이장은 “내가 우리 군 흉을 좀 볼께요”라고 운을 떼더니 그날 상황을 설명해줬다.

    제15대 심수관은 간담회가 끝나고 바로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손님을 초대해 놓고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은 장흥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의 속내는 심수관 본인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자골 주민과 제15대 심수관가의 끈끈한 인연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 윤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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